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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Oct 15. 2021

10살 아들의 질문

엄마보다 나은 아들

동글이가 갑자기 다가와 묻는다.


"엄마~ 광년光年이 뭐야?"


순간... '어?' 0.03초쯤 멈칫하다가 소심한 목소리로...


"미친X?"

"엄마! 내가 그런 말을 물어보겠어?"

"그럼 뭔데?"

"광년光年은 빛이 1 태양년 동안 진공 속을 진행하는 거리를 말하는 거야."

"알면서 왜 물어봤어?"

"천문대 수업할 때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배웠거든. 엄마도 아는지 보려고 했지."

"아~"

"엄마! 그렇다고 욕을 하면 어떡해!!"



광년(光年) 빛이 진공 속을 일 년 동안 진행하는 거리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
광년(曠年) 까마득히 오랜 세월
광녀(狂女) 정신에 이상이 생겨 미친 여자

출처 : 다음 어학사전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진짜 '미친년'이라는 말을 묻는 줄 알았다. 한참 한자어에 관심이 많은 동글이가 유튜브 채널 게임 영상 등에서 듣고 묻는 줄 알았던 거다.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빠른 속도로 '진짜? 광년이 그런 말이었어?'라고 하면 '그러니까 게임채널을 많이 보면 안 된다'라고 답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헛다리를 단단히 짚었다. 순간의 편견으로 '욕'하는 엄마가 돼 버렸고, 상식도 없는 무식한 엄마로 전락했다.


살면서 이런 실수는 자주 일어난다. 내가 생각한 답을 정해 두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경청하지 않거나, 있는 그대로 그 말뜻을 받아들이면 될 것을 한번 꼬아서 생각하고 혼자 오해하는 일들이 다반사다. 그래 놓고 나는 쿨하고 시원한 성격이라 자부하면서 타인을 비난하고 오해하며 그로 인해 빚어진 상처들을 남 탓으로 돌리곤 한다.


동글이는 순수하게 배운 것 그대로를 내게 물었고, 몰랐던 지식을 엄마에게 물어 확인받고자 했다. 그런데 10살의 동글이가 빛의 단위를 물어볼 거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기에 내 멋대로 유튜브 게임 채널의 많은 크리에이터들을 싸잡아 나쁜 X를 만들어가며 속어, 비어 등을 일삼는 그런 채널은 보지 말라고 이야기할 준비까지 했으니 얼마나 편견이 가득한 엄마였던가... 부끄러웠다.




어젯밤 늦게 퇴근 한 남편의 손에는 동글이를 위한 새 컴퓨터 자판기가 들려있었다.



두 손 가득 뿌듯하게 들고 와서는 아침에 일어나 자판기가 바뀌어있는 것을 본 동글이의 함박웃음을 기대하며 교체하기 시작했다. 게임에 진심 인 동글이는 실력이 날로 날로 늘어 이제는 아빠보다 고수가 되었다. 그 세계에서는 '고인물'이라고 불린다. 내 마음에는 영 마땅치가 않다. 남자들만 통하는 뭔가가 있는 듯하다.


"동글이 이 녀석, 게임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자판기가 석 달을 버티질 못해. 동글이가 W, A, S, D랑 스페이스바를 주로 쓰거든? 이것 봐! 사 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판이 다 지워졌잖아. 대단한 녀석이야."

"그게 칭찬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왜? 게임을 진짜 잘한다니까? 아빠가 자판을 바꿔놓은 것을 알면 인석이 엄청 신나 하겠지? 아~ 자기 전에 들어왔어야 되는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들고 들어오며


"동글아~ 아빠가 선물 사 왔어!!"

"와~ 아빠 최고!!"


라는 그림을 그리고 퇴근했는데 동글이는 이미 잠이 든 상태였다.


"동글이는 이런 아빠 마음을 알까?"

"오늘 미팅 있어서 늦는다더니 자판은 언제 샀어요?"

"자판이 잘 안 먹는다고 어찌나 투덜대던지... 이런 건 빨리빨리 사줘야 점수가 올라가."


아들바보 아빠의 후한 선심에 동글이의 컴퓨터에는 또래 친구들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신 그래픽카드가 깔려있다. PC방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사양으로 세팅된 컴퓨터에 둘이 나란히 앉아 주거니 받거니 게임 삼매경이다. 주부들이 (제일) 싫어하는... 어쩌면 나만 (제일) 싫어할 수도 있는 풍경이지만 두 사람이 소통하는데 필요하다 하니 그저 묵묵히 지켜볼 따름이다.




내 뜻과 맞지 않아도 상대의 생각을 그 깊이까지 알 수 없으니 묵묵히 지켜봐야 할 때가 있다. 가급적 악역은 엄마가, 선한역은 아빠가 하기로 한 우리 부부의 양육방식은 대체로 긍정적인 효과가 나고 있다. 아이들은 아빠가 화내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자랐다. 아이들에게서 훈육이 필요한 점이 보이면 남편은 내게 전한다.


"내가 퇴근할 때는 아이들이 뭘 하고 있든 간에 아빠를 맞아줬으면 좋겠어. 밖에서 일하고 돌아와 아이들이 반겨주지 않으면 힘이 빠져."

"앵글이가 사춘기라 감정의 기복이 심한 것은 알겠는데 아빠 있을 때는 좀 조심하라고 했으면 좋겠어. 앵글이가 화를 내면 가슴이 벌렁벌렁해."


남편이 마음을 전하면 나는 아이들과 대화를 한다. 아이들은 이내 알아듣고 그날 저녁 아빠의 퇴근 맞이를 성의껏 한다. 감정이 올라왔을 때 즉흥적으로 훈육을 하는 것보다 숨 고르기를 하는 것이 훨씬 긍정적 효과가 난다. 물론 어렵다. 울컥 올라오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환기가 필요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 부부가 자녀 양육에 대한 약속을 한 이유는 두 사람 다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것에 기인했다.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함께 소통하고 어우러져 쌓은 추억이 거의 없다. 아빠라는 위치는 아이들과 뒹굴고 친근하다고 해서 맞먹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아빠가 수용적으로 아이들과 어울려도 아빠의 위치가 굳건해질 수 있도록 엄마가 뒤에서 훈육하면 된다. 아빠는 퇴근 후 두어 시간과 주말과 휴일에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이지만 엄마는 아이들과 밀접하게 붙어있기 때문에 훈육 후 감정을 가라앉히고 품어 줄 넉넉한 여유가 있다. 그런데 아빠와 틀어지면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마음을 끌어안기 전 시간이 흐르고 지나간 일을 들추기 어려워 묻어가게 된다. 그래서 훈육은 엄마가, 양육은 아빠가 하는 것으로 약속을 했다. 그렇게 18년의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가족 모두가 평안하다. 각 가정마다 저마다의 양육법이 있겠지만 우리 집에는 이 방법이 적절했다.


잘 놀아주는 아빠 역할을 하기 위해 아들과 쿵짝이 너무 잘 맞아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다. 늘 컴퓨터가 문제다. 특히 온라인 클래스 주간에는 하루 종일 컴퓨터와 함께하는 듯 보인다. 헤드폰을 계속 쓰고 있으니 귀 건강에도 안 좋을 것 같고, 모니터를 계속 보고 있으니 눈 건강도 나빠질 듯하다. 계속 앉아 있으니 운동량도 부족해 보인다. 마음에 안 드는 요소를 찾자면 100 가지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빠가 아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기 위해 컴퓨터에 공을 들이고 있으니 잔소리는 마음의 소리보다 20%만 밖으로 꺼내 본다. 동글이는 그것도 많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20%의 간섭에는 아빠가 없는 시간 동안은 밖에 나가 뛰어놀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세대가 바뀌어 권위적인 부모보다는 수용하고 친구 같이 살아가는 양육을 택하는 가정이 늘어났다. 앵글이를 키울 때보다 동글이를 키우고 있는 지금의 학부모들은 우리 부부와 나이차가 띠동갑 이상 난다. 그들의 양육을 보며 배울 점도 많다. 퇴근 후 피곤한 것은 매한가지일 텐데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육아휴직도 번갈아 선택해서 하며, 가사도 잘 돕는다. 인식이 바뀌고 함께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분위기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가정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정착되어 가는 것 같아 보기가 좋다.


동글이의 질문과 나의 답문의 오차 범위가 너무 커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있는 그대로 보고, 마음이 가는 대로 감정을 전달하며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내 안에 쌓인 편견으로 짐작해서 앞서가는 오류를 끊임없이 범하게 된다. 동글이에게서 또 하나 배웠다.





아이들과 함께 크는 로운입니다.

















사진출처 : 다음 어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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