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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Dec 13. 2021

누나~ 한 입만~

"싫어!"

앵글이는 좋아하는 음식 몇 가지만 주로 먹습니다. 특히 한식 국, 탕, 찌개 등을 즐기지 않죠. 그중 잘 먹는 것은 김치찌개, 소고기 뭇국, 미역국, 갈비탕, 직접 집에서 끓인 곰탕 정도입니다. 그나마도 국물은 먹지 않고 건더기만 먹기 때문에 뭇국을 끓일 때 무 하나를 모두 넣어 끓여서 국물보다 건더기가 더 많도록 조리하곤 합니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늦은 오후. 저녁 준비가 되지 않아서 자주 들르는 식당에서 청국장을 포장해서 왔습니다. 청국장 한 그릇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이면 밥에 얹어 쓱쓱~ 비벼먹는 그 맛이 꿀맛이죠. 그러나 앵글이는 된장이 들어간 저녁 메뉴가 식탁에 올라오면 일단 다른 때울 거리를 찾습니다.


앵글이 기말고사 일정에 맞춰 갑자기 퇴원을 하게 되어 병원 근처 식당에서 포장 한 청국장이 저녁 메뉴가 되었습니다. 세 식구는 청국장을 뜨슨밥에 얹어 쓱쓱 비벼 먹었습니다.



하교 후 5:20. 집에 들어서는 앵글이는


엄마, 퇴원했어? 금요일에 온다더니...?

그럴까도 생각해 봤는데 어차피 예정보다 일찍 나올 거면 그냥 퇴원해서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왔지.

나 보고 싶어서 일찍 왔구나?

엄마 없어서 불안하다는데 와야지... 그나저나, 앵글아~ 저녁 뭐랑 먹을래?

글쎄. 찾아보고... 오늘 저녁은 뭐였어?

청국장. 퇴원하는 길에 사 왔어. 청국장도 맛있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청국장이야.


냉장고와 팬트리를 열어보며 고민하던 앵글이는


오늘 땡기는 게 없네... 그냥 라면 먹어야겠다.

샐러드 판다랑, 케이크, 과일도 있고... 뭐 다른 거 배달시켜줄까?

아니야. 그냥 라면 먹을래. 짠맛이 땡겨.

 

라고 합니다. 결국 라면이 당첨이네요. 우당탕쿵탕쿵 라면 하나 끓이는데 부산함의 극치를 달리네요. 저 건너에서 동글이가


어? 라면 냄새가 나는데?


관심을 입으로만 보이며 여전히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두드립니다.



너무 멀건가? 맛없어 보여?

아니, 맛있어 보이는데?

그래?

(후루룩 한 입 넣더니) 오~ 맛있어. 간이  맞아.

거봐. 맛있어 보였다니깐...


군침을 삼키던 동글이가 한 마디 건넵니다.


누나, 한 입만~

싫어!!!


단호하고 가차 없이 거절입니다. 매정한 한 마디가 허공을 찌르며 동글이에게 꽂힙니다.


힝... 나도 라면 먹고 싶은데...

먹고 싶으면 너도 끓여 먹어! 그런데 국물 라면은 이게 마지막이었어. 비빔면밖에 없어.

앵글아, 라면도 그게 마지막이라면서 그냥 한 입 주지... 너무 매정하게 자르는 거 아니니?

싫어! 나도 이게 저녁밥이잖아. 안 줄 거야.


고2 앵글이의 당찬 답변입니다. '몇 가닥 숟가락에 얹어 한 입만 주면 될걸'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수술로 지난 한 주 살림 사느라 애쓴 딸내미에게 한 마디 잔소리를 하기에는 제 입장이 그리 당당치는 않네요. 동글이는 팔이 불편한 엄마에게 차마 부탁 못하고 애먼 아빠에게 부탁합니다.


아빠, 나도 라면...

동글아, 좀 전에 밥을 먹었는데 라면이 들어가?

그럼, 먹을 수 있어.

국물 라면이 없다잖아. 너 비빔면 안 좋아하는데도 먹을 거야?

이제 좋아하려고. 먹을 수 있어.

아빠가 끓여줬는데 안 먹으면 아빠가 속상할 수도 있는데?

다 먹을 거라니까? 끓여줘...


며칠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남편이 참 너그러워졌습니다. 아들의 요구에 귀찮을 법도 한데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일하던 중인 작업을 뒤로한 채 부엌으로 갑니다. 그러고는 비빔면 하나를 꺼내 들며 앵글이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앵글아, 아빠가 이거 한 번도 안 끓여봐서 모르겠는데 어떻게 끓여야 해?

짜파게티처럼 끓이면 되는데 좀 다른 점은 면을 찬물에 한 번 씻어내야 해.

그래? 뭐 그리 복잡해??


우여곡절 끝에 비빔면을 완성한 아빠가 쟁반에 받쳐 들고 동글이의 책상으로 다가옵니다.



동글!! 아빠가 이거 힘들게 끓인 거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먹어야 해!

응... (한 입 먹더니) 아빠, 엄청 맛있어. 

그래? 다행이네. 그래, 그래. 맛있게 먹어라...




앵글이의 감정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쩔 때는 너무 따뜻하고 배려가 넘쳐 감동을 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살얼음이 위험스럽게 펼쳐지고, 때로는 뾰족한 고드름이 정수리를 찌르는 듯하기도 합니다. 세 식구의 생각에는 그깟 라면 한 입이 뭐라고 이 전쟁을 치루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앵글이에게는 저녁 한 끼였기 때문에, 그것도 엄마가 끓여준 것도 아니고 배가 고픈 것을 참고 혼자 끓여 먹어야 했던 라면 한 입이 아깝기도 했을 듯합니다. 눈치 없는 10살 동글이가 그 레이다에 걸려 한 소리 야박하게 듣고 말았지만, 동글에게는 무한 애정을 뿜어내는 아빠가 있어 서럽지는 않았습니다.


시험기간이라며 시험 망쳐도 이유가 있어 마음이 가볍다던 앵글이가 말은 그렇게 해도 속은 시끄럽겠죠. 시험이 뭐라고, 아이들의 행복감을 순식간에 앗아가기도 합니다. 고난과 역경이 깊을수록 딛고 서면 기쁨이 더욱 가치로와지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고딩이들의 하루하루는 참으로 고달픕니다. 앞으로 1년, 앵글이와 함께 할 고3 시간이 아주 기대가 됩니다.


퇴원 후 처음 맞은 저녁시간.

라면 한 그릇, 아니 라면 한 입으로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실랑이가 비교적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별일 아닌 것이 당사자에게는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으니 앵글이에게 라면 한 입과, 동글이의 라면 한 입은 많은 차이와 의미가 있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앵글이의 당찬 거절로 쇼핑앱을 열어 종류대로 라면을 주문해 봅니다. 컵라면과 봉지라면을 하나 가득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하기를 누르고 나니 마음이 한 결 가볍네요. 늦은 저녁 동네 슈퍼에서 배달 온 라면입니다. 잔뜩 쌓인 라면을 보니 언제 다 먹을까 싶지만 팔을 자유롭게 사용하려면 두 달은 족히 걸릴 듯 하니, 한 끼 때울 거리가 채워진 것만 봐도 마음은 넉넉해진 저녁입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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