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에 썼던 글이 주말 새벽 갑자기 피드에 올랐다. 자고 깨니 이미 5만 회가 넘어가고 있었다. 허락을 구하거나 알림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서 갑자기 조회수가 늘어나면 '피드'에 실린 거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감사한 일이다. 언제나 느끼지만 피드로 글 하나가 올라가면 그 덕분에 다른 글들도 덩달아 읽히는 수혜를 입는다. 글이 읽힌다는 것에 감사하고 반응이 좋으면 더 감사하지만 상처가 되는 댓글이 달리면 좀 무섭다. 아직 내 안의 소심이가 덜 자란 탓이다. 브런치 생활에 익숙해질 법 한데 아픈 댓글에는 겁이 먼저 난다.
잭팟의 주인공은 앵글이와 요리 에세이가 대부분이다. 지나가는 말로 앵글이가 '본인 글이 잭팟을 터트릴 때마다 선물을 받아야겠다'라고 말할 정도다.
10월 30일~31일 하루 반 동안 18만을 찍었다.
앵글이를 주인공으로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첫 아이를 키우는 모든 엄마들은 첫 아이가 어렵다. 나도 첫아이와 같이 자라며 난생처음 해보는 경험, 갈등, 혼란을 겪고,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나도 사춘기를 함께 겪는다. 그래서 둘째들보다 첫째에게서 더 여유롭지 못하다. 살아가는 내내 낯선 경험의 연속이라 첫아이에게는 시행착오가 따른다. 첫째라 많은 사랑으로 키우지만 첫째라 엄마의 미숙함으로 시행착오가 생기기에 늘 미안하다. 둘째만큼의 여유가 없기에 둘째보다는 퍽퍽하게 키우게 되는 것 같다.
둘째는 뭘 해도 괜찮다. 받아쓰기 한 개를 맞아와도 웃음이 나고, 숙제도 안 하고 종일 놀거나, 독서록 제출을 안 했다거나 실기 영상을 안 올렸다고 담임선생님께 문자가 와도 허허실실이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늦었어도 지금 알았으니 늦게라도 내면 되지."
이런 여유가 첫째에게는 없다. 별일 아닌 것에도 과한 액션이 따르고, 놀라고, 당황한다. 그리고 아이를 채근하게 되고 매사 못 미덥다. 지나고 나면 둘째에 비해 첫째가 모든 면에서 앞섰고 칭찬받을 만한 일을 더 많이 했음에도 여유가 없고 마음이 쫓기는 엄마의 불안정함 때문에 오롯이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기가 어렵다.
그런 이유로 앵글이와의 일화는 대화체 그대로, 가감 없이 쓰는 편이다. 사춘기 자녀, 고학년 자녀와의 대화가 비슷한 또래를 키우고 있는 독자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때문이다.
브런치의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핸드폰으로 글을 읽는다. 그래서 글을 쓴 후 핸드폰으로 다시 읽으며 교정을 한다. 너무 길면 읽으며 지루하고, 점핑해서 읽으면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자녀를 둔 부모의 시각으로 글을 읽으려다 보니 줄줄이 서술한 글보다는 '사춘기 자녀와의 대화' 중심으로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전달력이 있었다. 그래서 앵글이가 주인공이 되는 글은 대화체가 많다.
앵글이의 조퇴 글은,
앵글이와 대화를 나누다가 학교 수업시간에 있었던 수업 내용을 듣고 그 내용이 재미있고, 수업을 재미있게 이끌어주신 선생님의 다양한 교수방법이 인상적이어서 그 부분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중심에 두고 글을 쓰다 보니 전후 사정에 대한 서술이 부족했다. 갑자기 댓글로 날아온 구독자의 생각은 앵글이의 학교 생활이 불성실하다는 내용에 꽂혔다. 아이를 두둔하는 엄마가 되었고, 옳지 않은 길로 가는 아이를 바로잡지 못하는 부모로 인해 학교 현장에서는 고민이 많다는 쪽으로 댓글을 달렸다. 그 댓글에 '내 아이는 교칙을 잘 지키고, 학교를 좋아하며,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는 아이'라고 답글을 달아야 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몇몇 글에 답글을 달다가 문득 멈추게 됐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해서이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글은 "사춘기 자녀와의 대화"였다.
아이들이 고학년이 될수록 말 수가 줄어들고, 부모 자식 간의 간격이 벌어진다. 그래서 일상의 대화를 편안하게 나누는 일화를 씀으로, 사춘기 자녀와도 일상적인 수다가 가능함을 전달하고 싶었다. 가정에서의 대화는 [학업, 시험, 성과, 학원, 성적] 이런 내용이 아닌 [일상적인 학교 생활, 교우관계, 수업시간과 수업 내용, 수행평가 시 엄마가 도와줄 점, 남매간의 관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등을 나누고 그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읽히도록 쓰고 싶었다.
그렇게 쓴 글이 피드로 가고 놀랄만한 조회수를 얻었다.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음은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와의 일상이라 독한 댓글이 달리면 상처가 된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계속 고민하게 된다. 아마도 자식에 관한 일화이기 때문에 더 민감해지는 것 같다.
피드에 올라간 글은 수정을 하면 피드에서 내려온다.
순간 갈등을 했다. 수정 버튼과 재 발행 버튼을 누르면 글이 피드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잭팟을 날린 글이 피드에서 내려오고, 더 이상 읽히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한 다른 글들의 수혜도 사라진다. 오랜만에 새로운 구독자 친구가 생겨날 기회도 사라지고, 나름 잃는 것이 생긴다. 짧은 시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글을 지워야 하나? 댓글을 막을까? 갈등하다가 우연히 댓글을 삭제하는 법을 알게 됐다. 많은 가시가 돋친 2개의 댓글을 임의로 지우고 내내 편치 않았다. 일반 글이었으면 그냥 두었을 거다. '이전 글에도 칼날이 선 댓글을 써 주던 그분이었을까?' 생각하다가, 그때도 그냥 두었으니 '댓글도 평가라 생각하고 그냥 두는 것이 맞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글을 쓰면서 댓글창을 열어두는 것은 글을 피드백해주는 독자의 시각을 알고 싶어서이다. 읽은 이의 생각을 읽게 되면 글을 쓰며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이 잘 전달되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그래서 칼날이 선 댓글도 다시 곱씹어 읽고 발전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앵글이 이야기라 혹시라도 아이가 읽게 될까 염려가 되어 죄송했지만 끝내 지웠다.
내 안의 소심이가 괴롭혔다.
잠을 못 이뤘고 새벽 2:30에 글을 쓰고 있다. 댓글을 지운 것도 마음에 걸렸고, 새 아침이 밝은 후 칼날이 된 새로운 댓글이 나를 맞이할 때 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피드에 오른 글에 수정과 재 발행 버튼을 눌렀다. 피드에서 글이 내려오니 더 이상 라이킷과 구독자의 변동은 사라졌다. 댓글도 더 이상 달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마음에서 자유로운가?
이런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공개된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것들을 감수할 만한 뱃보도 있어야 한다. 글에 대한 고료를 받고 쓰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가 있고, 독자의 평가가 뒤따라 오는 것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독자의 평가는 공감일 수도 냉혹할 수도 있다. 그 평가가 냉혹하다고 해서 피해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댓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답글로 정성껏 전달했는데 그것이 알량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되돌아왔고 나의 진심은 거짓으로 돌변했다. 내 마음과 상관없이 읽는 이의 마음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포가 형성되지 않은 독자의 댓글은 잔혹했다.
그동안 꾸준히 글을 읽어준 독자들의 댓글은 따뜻하다. 그러나 그들의 따뜻한 댓글로 나의 글은 불친절해졌다.
구독자의 댓글에 힘을 얻고 위안과 기쁨을 얻는다. 그러나 꾸준히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에 익숙해진 내 글은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쓰였고, 자세한 전후 사정이 빠져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비싼 값을 치르며 깨닫게 되었다.
브런치에 매일 새로운 작가들이 탄생한다.
한 달이 되기 전에 그들이 쓴 글이 피드와 메인에 걸려 구독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브런치가 작가를 잃지 않기 위한 응원 같은 수혜이다.
어느 날부터 메인과 인기글, 피드를 살펴보지 않는다.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한 노력보다는 '나의 발전'에 목적을 두고 글을 쓰게 됐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방향을 아직도 알지 못한다.
현재 내가 쓴 글 중 잘 읽히고 있는 글은 일상생활 가운데 아이들과 함께 나눈 대화들과 나만의 방법으로 요리한 음식 글들이다.
음식에 관한 글은 글을 쓰면 바로 피드로 가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
피드로 가서 얻는 즐거움도 있지만, 내가 만든 음식이 다른 사람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레시피를 검증받는 느낌이어서 기쁘다. 기름진 음식도 싫어하고, 저염 음식을 선호한다. 예전에는 내 음식이 맛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그래서 저염으로 기름기를 제한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방법을 많이 생각했다. 지금은 내가 먹어도 맛있다. (^^) 그런데 다른 분들이 만들었는데도 맛있고, 다음 음식을 기다려 주시는 것에 사명감 같은 의욕이 솟는다. 그래서 요리 에세이에 나름 욕심이 생겼다. 흔하고 익숙한 재료를 사용하되 나만의 방법으로 만든 음식을 최대한 알기 쉽고, 따라 하고 싶도록 쓰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육아 에세이도 잘 읽히는 글 중 하나이다.
그래서 재미있는 일화를 되도록 대화체 그대로 적는다. 적으면서 '아이들이 왜 부모에게 존댓말로 말하지 않지?'라고 하실까 봐 신경이 쓰일 때도 있다. 우리 집은 "죽고 사는 것이 아니면 다 괜찮다."는 나의 가치관으로 아이들이 살고 있다. 허용의 범위가 정확하고, 한번 안 되는 일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된다. 봐주기는 없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떠한 기준과 선을 넘지 않는다. 아이들이 편안한 언어로 이야기해도 그것이 '은어, 속어, 비어'가 아니라면 가급적 불필요한 잔소리는 없다. 마음껏 이야기하고 표현해도 괜찮다. 밖에서 사회생활로 긴장된 사고를 집에서 편안하게 풀어내도록 두는 것이 나의 양육법이 되었다.
아이들은 보통의 아이들보다 해맑고, 순진하다. 때로는 약지 못한 아이들이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것이 어려움으로 다가올 때 방패막이가 되어주기 위해서 나를 단단히 하려고 노력한다. 자기 결정권을 갖도록, 자기의 생각을 두려움 없이 말하도록 앵글이를 그렇게 키웠는데 잘 자라주었다. 덕분에 동글이는 한결 수월하게 자라고 있다.
'자기 통제와 허용' 그리고 '자기 결정권'을 갖고 자라도록 돕는 엄마이고, 교사이고 싶다. 아주 사소한 것, 아이스크림 하나를 고르는 것조차도 엄마가 아닌 아이 스스로 결정해서 고르도록 한다. 진로를 결정하는 것도 자기 인생이므로 자기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공부를 잘해서 모두가 원하는 SKY를 간다 해도 그것은 너의 인생이므로 네가 빛나는 것이지, 네 성공이 나를 위한 것은 아님을 이야기한다. 자식이 잘되어 기쁘고 보람된 마음을 주는 것은 자식으로서 효도가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자녀가 행복감을 갖고 살 수 있는 선택을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응원할 준비가 되어있다.
어제오늘 칼날이 선 댓글로 상처가 되었지만, 사실이 아니고, 나를 잘 모르는 이의 평가로 인해 주저앉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그리고 브런치의 작가로 이제 막 발을 딛는 작가님들께 글을 쓰는 것과 평가받는 것에 자유함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해 주고 싶다.
브런치 안에서는 서로가 모두 작가이기에 암묵적인 보호를 받게 되지만, 이것이 피드로 올라 공개적이 되면 보호받지 못한다. 마치 가정과 같다. 내 자녀가 내 품 안에서는 마음껏 누리고 기량을 펼치는데 자유하지만,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내 손을 떠나게 된다. 사회 안에서 산전수전을 겪고 상처를 받고 때로는 폭력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 내가 지켜줄 수 있는 선은 내 품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브런치에서도 브런치 안에서만 자유하다. 내 글이 밖으로 나가면 밖에 나간 내 자녀와 같아짐을 깨닫게 되었다. 남들의 비판적인 평가로 내가 걷고자 하는 길과, 소신이 꺾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