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창조적인 생활에도 무미건조한 시기는 있게 마련이다. 가뭄이 찾아오면 삶은 감미로움을 잃고, 하는 일도 기계적인 것이 되고, 모든 것이 공허하고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가뭄의 시기는 마음의 사막이다.
• 가뭄으로 감정은 모두 메말라버렸다. 끔찍한 가뭄은 우리를 여전히 아프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으로 쓰러지지 않으면 가뭄이 끝난다. 가뭄이 과연 끝날지 의심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가뭄에서 헤어나려고 애를 써 왔기 때문에 마침내 끝난 것이다.
• 창조적인 삶에서 가뭄은 필수적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이다.
• 명성을 얻고 싶은 욕망은, '아직도 명성을 얻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당신을 부추긴다. 명성은 성공과는 다르다.
• 명성은 중독성이 있어서 우리를 항상 굶주리게 만든다. 명성은 정신적인 마약이다.
• 명성을 쟁취하고 유지하려는 욕망은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가 아니라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집착하게 만든다.
• 명성을 얻고 싶은 욕망은 어떻게 하면 인정받고 명성을 쌓을 수 있을지에 더 관심을 쏟게 되는 것이다.
• 명성에 초점을 맞추면 지속적인 결핍을 느끼게 된다. 끝없이 명성을 쫓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끝없는 욕구는 언제나 뒤에 바싹 따라붙어 재촉해대면서 우리가 거둔 성과를 의심하고 우리를 서서히 파괴할 것이다.
• 자신을 소중하게 다룰수록 더욱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명성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었을 때는 자신을 아낌으로써 해독해야 한다.
• 명성이란 자신을 인정하는 지름길이 아닌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만족하려고 노력하자.
•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명성 없이는 사랑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 작지만 구체적이고 애정이 깃든 행동은 이러한 두려움을 해결해준다. 우리는 활발히 그리고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창조적으로 내면의 예술적 자아를 키워야 한다.
• 명성이라는 마약의 치료제는 창조적 노력뿐이다. 창조의 기쁨을 누릴 때에야 그 강박증에서 해방될 수 있다.
[좋아하면 울리는 / 천계영 / 넷플릭스]
알람이 울려야 사랑인 세상, '좋알람'을 울릴 수 없는 여자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은 두 남자의 순도 100%의 직진 로맨스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을 소개합니다. 웹툰을 먼저 읽고,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드라마 1, 2부를 보았습니다. 원작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도록 제작된 드라마는 입체감이 있어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원작에서 주는 재미에는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알람이 울려야 사랑이 확인되는 세상,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선 위치에서 10m 이내로 들어서면 핸드폰에 하트가 표시되며 나를 좋아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기록됩니다. 이것은 웹툰 속 세상에서 바뀌지 않는 명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반경 안에 들어왔을 때 내 핸드폰에는 알람이 울립니다. 그런데 나의 핸드폰에는 '나의 마음을 감추는 방패'가 설정되어 사랑하는 사람의 핸드폰에 내 마음을 표시할 수 없습니다. 웹툰 속 세상에서는 핸드폰에 나타나는 사랑의 증표가 곧 마음이기 때문에 주인공 조조는 자신의 핸드폰에 설정된 방패를 없애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확인받고 싶어 집니다. 마음속에서 움트는 감정은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핸드폰에 표시된 사랑이 곧 증표가 되는 세상에서는 사랑을 확인시켜주지 않아서 불안이 감돕니다. 남자와 여자는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시켜 주지 못하는 여자는 미안하고, 사랑을 확인받지 못하는 남자는 불안합니다.
오늘의 명상은 [창조성의 가뭄 극복하기 / 명성이라는 마약]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나누고픈 이야기는 [수치화되는 사랑]입니다.
브런치에서의 명성은 무엇일까요?
"조회수, 구독자수, 메인과 피드 노출"일까요?
숫자에 민감해지려 하지 않아도 내 브런치 속 '통계'를 누르면 매일 수치화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나도 모르게 눌러보게 되고, 메인을 열어보고, 인기글에 내 글이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지난 5개월 동안 일상이 되어버린 브런치 확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 거듭되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인지, 조회수와 구독자수를 늘리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인지 갈팡질팡, 헤매고 다녔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흐름을 읽게 되니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글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은 글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습니다. 목적성이 있는 글, 잘 보이려 애쓴 글은 감추려 해도 티가 나며 어색한 표현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점이 독자들의 눈에는 더 잘 보입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읽고 몇 번의 퇴고를 거쳐 발행해도 어색한 문맥이 드러나고, 오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글을 발행한 후 발견된 어색한 문맥을 정리하게 될 때면 이미 읽고 지나간 독자들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거듭 퇴고했음에도 부끄러운 글을 내보인 것이 죄송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해 주시고 댓글로 마음을 나눠주심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사랑을 수치화해서 그것이 명제가 되는 세상에 산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천계영 작가에게 웹툰 속 앱을 계발하도록 앱 계발권을 수락해 달라는 청이 들어오기도 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정말 그런 앱이 있다면 행복할까요?
사람의 감정을 0과 1로 가늠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연인, 부부가 서로의 마음을 나누기까지 하루에도 12번씩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단순히 표시되는 숫자로 그 많은 감정들을 정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웹툰 속에서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내 곁에 다가오는 줄 알고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범죄에 노출되기도 하고, 마음은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표시되지 않아서 불안감을 갖고 살아간다면 행복은 아마도 내 곁에 머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학령기에 접어들고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12년 동안 수없이 많은 숫자들이 나를 대변합니다. 그것이 나를 평가하는 절대적 도구로 사용되어 서열화된 세상에서 12년을 살아갑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숫자가 주는 어마어마한 의미는 세뇌되다시피 우리를 옥죄입니다. 사람마다 각기 재능이 다르고, 품성도 다른데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매겨진 점수는 나의 재능과 품성에 상관없이 1등부터 300등까지 잔인할 정도로 여과 없이 평가합니다. 제가 살아왔던 어떤 시절에는 다소 비행을 저질렀어도 전교 석차가 우위에 있으면 어느 정도 무마되고, 성적이 나쁘면 잘못에 비해 과한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살아온 우리가 부모가 되니 자녀들도 그런 부당한 경우와 마주할까 염려되어 나도 모르게 '공부! 공부!'를 외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핑계입니다.
창조성의 가뭄은, 때때로 감정에 기복이 생기고, 의욕이 떨어지며, 여러 가지 상처로 아픈 시기를 겪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남의 일일 때는 쉽게 '어서 툴툴 털고 일어나라!'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 문제가 되었을 때는 아프고, 버겁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힘을 내서 우뚝 서면 또 한 계단 성장한 나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죠.
숫자로 평가되서는 안 될 것 중 하나가 사랑이고, 그 사랑이 수치화되었을 때 어떠한 혼란이 야기되는지 작품에서 이야기합니다.
수치화해서 보여 준 브런치의 선물에 신문물을 만난 듯 신기했지만, 얼마 지나고 보니 씁쓸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저 또한 가시적인 수치에 현혹되어 명성이라는 마약을 삼켰던 것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내가 쓴 글에 부끄럽지 않고, 읽어 주시는 독자들이 허탈하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마음을 모으겠습니다. 순서대로 읽고 있는 아티스트 웨이가 시기적절하게 깨달음의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명상을 하며 대면하는 하루는 신기합니다. 그리고 치우치지 않도록 깨달음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매일 "함께 가는 길"을 같이 걸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