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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Dec 10. 2021

매일 남편이 씻겨줍니다.

전업주부로 투잡 뛰는 내, 편 남, 편?

2주 전 앵글이와 이성교제, 애인, 결혼, 부부생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함께 TV 드라마를 보다가 여주인공이 남자 친구와의 첫 여행을 계획하며 속옷을 구입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엄마, 엄마도 속옷 사러 백화점 갔었어?

그때는 혼전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아서 결혼 전에 남자 친구와 여행을 다니진 않았지. 신혼여행 가방 싸느라 잠옷을 샀던 것 같아.

속옷이 중요한가?

뭐... 18금으로 얘기해줘? 아니면 19금 이상으로 얘기해줘?

19금 이상??

속옷 입고 보여줄 일이 없어. ㅋㅋㅋ

뭐야~ 너무 야하잖아.

생각해봐. 호텔방에 둘이 들어갔지. 그럼, 네가 먼저 씻을래? 내가 먼저 씻을까? 얘기할 테고, 대체로 남자가 먼저 씻게 되는 것 같아.

왜?

쑥스럽기도 하고, 짐 가방도 풀어야 하니까... 남자들이 더 빨리 씻잖아. 여자들은 좀 오래 걸리지.

그렇겠네. 화장도 지우고 씻고 하려면...

그래. 그래서 씻었어. 속에 속옷을 입을 필요가 있을까? 욕실 안에 샤워가운이 있을 텐데??

아~ 나는 안 가봐서 모르지... ㅋㅋㅋㅋㅋ

그렇겠구나. 욕실에 2벌의 샤워가운이 있으니까 씻고 가운만 입고 나오면 될 텐데 잠옷이랑 야한 속옷이 뭐하러 필요해.

우리 엄마 너무 음란마귀 같아.

아~ 보여줄 수 있겠구나?

언제?

아침에 일어나서?? ㅋㅋㅋㅋㅋㅋ

고등학생 딸한테 너무 리얼하게 설명해주는 거 아냐? ㅋㅋㅋㅋㅋ


앵글이와의 대화를 이어가다가,


어차피 신혼 때는 목욕도 같이 하게 되고, 씻겨도 주고 등도 밀어주고...

뭐?? 목욕을 왜 같이해? 자기 혼자 하면 되지. 자기 손은 어쩌고 씻겨줘?

손이 없어서 같이하니? 그냥 씻겨주고 싶어서 같이 하는 거지. 그러다가 눈이 맞으면... 홍홍홍... 뽀뽀도 하고 그러는 거지.

우리 엄마는 대화에 수위가 없어.

어차피 너도 다 잘 알면서 내숭 떠는 거잖아. 18세쯤 되면 알건 다 아는 나이지.

그래도 엄마처럼 이렇게 딸한테 대놓고 얘기하는 엄마는 없을걸?

같이 씻고 하면서 구석구석 때도 좀 밀어주고 그러는 거지. 살다 보면 아파서 씻겨줘야 할 일이 생기기도 하고...

난, 결혼 안 해야겠다. 같이 목욕도 하고 씻겨주고, 그런 건 못할 것 같아.

일부러 씻겨달라는 게 아니고 아프거나 다쳐서 씻겨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해?

그럼... 음.... 에이... 몰라. 난 결혼 안 할래.

뭘 그런 것 때문에 결혼을 안 해... 사랑하면 다 해주고 싶고 그런 거지.




앵글이와의 대화는 씨가 되어... 남편의 도움 없이 씻지 못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최소 한 달, 최대 두 달은 남편의 도움을 받아 머리도 감고 목욕도 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죠. 수술을 하고 주사제 부작용으로 5일은 꼼짝없이 누워있었습니다. 코로나로 보호자 출입이 불가한 병원 방침으로 수술도 환자가 직접 사인한 후 했고, 회복실에서도 병실에서도 통증과 싸우며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간호간병 병동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주사제를 끊고 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도 몸도 꿉꿉한데 한쪽 팔은 보조기 착용으로 묶여 있고 하필 오른손이라 어쩔 수 없이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야 해서 간호사님께 보호자 출입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체크와 소독을 마친 남편이 씻겨주기 위해 병실을 찾아왔습니다.


샴푸를 포함한 목욕용품과 드라이기, 타월, 로션 등을 챙긴 거다란 가방을 들고 개선장군처럼 등장한 남편과의 만남은 5일 만입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입원과 수술을 하고 있던 기간 내내 살림을 도맡아가며 아이들 챙기고 먹이고 회사일까지 하느라 분주했던 남편은 병실로 아내까지 씻겨주기 위해 방문해 주었네요. 일 하나를 더 얹어주는 것이 내심 미안했지만 남편의 방문은 언제나 반갑고 좋습니다.


당신 없으니까 집에 사람이 안 사는 것 같아. 아무 소리도 안 들려.

그래? 좋은 건가??

얼른 낫고 와. 아주 죽겠어... 힘들어...

나 한 사람 없는데 집이 안 굴러가지?

그러네. 그냥 집에 와서 가만히 누워 있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오기나 해.

머리를 5일 동안 못 감았더니 리가 무거워.

에잇 더러워... 얼른 씻자.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 할 일이 태산입니다. 보호대를 커다란 비닐로 감싸 밀봉을 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하거든요. 물이 들어가면 큰일이니까요. 오랜만에 일어났더니 어질어질했지만 씻을 수 있는 상황이 어찌나 반갑던지요... 변기에 걸터앉아 머리를 숙이고 남편의 손길에 맡겨봅니다. 샤워기의 따뜻한 물줄기가 머리를 적시는데 머리 감은 게 뭐라고 코끝이 찡합니다.


어? 샴푸를 엄청 발라도 거품이 안나. 너, 너무 더러운 거 아냐??

두 번은 감아야겠지?

일단 씻어 내고 다시 감자.


샤워기로 머리를 헹궈내고 샴푸를 다시 묻혀 벅벅벅~ 남편의 투박한 손길이 예전 같으면 아팠을지도 모르는데 머리가 답답하다가 긁어줘서 그런지 시원하기만 합니다. 다시 헹궈내고 또다시 샴푸로 도배를 합니다.


세 번이나? 그렇게 더러워??

응. 세 번째쯤 되니까 이제야 거품이 제대로 나네. 씻기고 나니 좀 사람 꼴이 되는 것 같아. ㅋㅋㅋㅋㅋ 너, 진짜 더러워.

ㅋㅋㅋㅋㅋ 정성껏 닦아줘요. 그래야 3일에 한 번 와도 괜찮지. 안 그러면 매일 씻기러 와야 해.

목욕도 할까?

좁아서 괜찮겠어?

봐봐. 이미 옷이 다 젖어버렸지? 젖은 김에 그냥 씻겨줄게.


머리도 감고 목욕도 하고 나니 기분도 한결 좋아졌습니다. 워실 뒷마무리 하느라 남편은 분주하지만 난생처음 남편의 서비스를 받는 것도 꽤 괜찮은 기분이네요. 한참 샤워실 정리를 하고 벗어놓은 환자복도 내다 놓고 바닥의 물기도 제거하고 나온 남편은 병실 침대에 내를 앉혀두고 머리를 말려줍니다.


머리숱이 장난 아니게 많네. 한참 말려야겠어. 그냥 짧게 잘라버릴까 싶은 생각이 다 드네?

그럴까?

다 낫고 나면 후회하겠지?

그렇겠지...


머리를 털고 드라이기로 말리는데 십 분도 넘게 걸렸습니다. 그 사이 남편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입니다.


샤워를 하고 집에 갈래요?

안돼. 간호사님이 얼른 씻기고 가라고 했어. 규칙은 잘 지켜야지. 내가 며칠 뒤에 또 올게.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젖은 수건과 빨랫감 등을 챙긴 남편이 일어섭니다. 승강기까지 배웅을 하고 돌아서는데 간호사님이 혈압을 재러 들어오십니다.


그렇게 좋으세요?

네?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와요. ㅎㅎㅎㅎ

티나요?

네.. 엄청요... 남편분을 엄청 좋아하시나 보다...

제가 좋다고 쫓아다녔거든요.

그런 말은 아껴야 하는 건데요... ㅎㅎ

그런가요?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거 많이 티나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져요. 사이가 엄청 좋으신 것 같아요.

네...

씻겨 주시려고 짐 잔뜩 싸들고 오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ㅎㅎ


간호사님은 혈압과 체온 체크를 해 주신 후 나가셨습니다. 남편이 집에 도착할 즈음 전화를 했죠.


잘 들어갔어요?

응. 허리가 아파...

그러게... 고생이 많아... ㅎㅎ 그런데 간호사님이 내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온대. 뭐가 그리 좋냐고 하시네?

내가 티 내지 말라고 했지...ㅋㅋㅋ

감춰지지 않았나 보다... ㅎㅎ 오늘 고마워요~




금번 수술이 있기 전까지 남편은 집안 살림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잔병치례가 많은 편이라 입원과 퇴원을 자주 하고 수술도 여러 번 했지만 그때마다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거나, 제가 외출증을 끊어서 집을 오가며 입원기간을 보냈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팔을 못쓰는 점이 가장 큰 이유가 되긴 했지만 남편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고 사랑이 느껴지네요. 성품은 자상하지만 아이들과 살림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거든요. 남편이 제가 할 일까지 모두 맡아해 준 덕분에 저는 제 몸 추스르는 일만 하면 되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보호자 없이 수술을 하고 입원을 했습니다. 보호자 동의서 없이 환자 본인이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수술 후 회복실에서도, 병실에서도 오롯이 홀로 통증과 함께 해야 했죠. 어차피 못 오는 상황이라도 남편 마음은 가볍지 않은 모양입니다.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네요. 늘 고마운 남편입니다.



아이들의 끼니를 챙기며 남편이 처음 해 본 밥입니다. 전기밥솥을 처음 사용하는 남편은 쿠쿠와 함께여도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홀로 쌀을 씻고 밥을 한 후 소분해서 아이들의 저녁 준비까지 해 놓고 출근을 하려는 모양입니다. 계속 물어보기에 설명을 해 주었지만 결국은 자기 방법대로 밥을 짓고는 성공 샷을 보내주네요. 날로 성장하는 살림 솜씨입니다.



오른팔을 쓸 수 없으니 제일 불편한 것 중 하나가 머리 묶기입니다. 한 손으로 절대 할 수 없는 것 중 하나였네요.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남편은 머리 묶기를 열 번쯤 시도하다가 이제는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오~ 드디어 감을 잡았어. 이제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머리 묶기에 성공할 남편은 기뻐합니다. 덕분에 저는 한가닥씩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귀찮지 않아서 너무 좋네요.





앞으로도 3주는 보조기를 착용한 채로 살아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각도를 조절해 주시는데 현재는 75도 정도 구부렸다 폈다를 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보조기의 도움을 받으니 통증이 한결 덜 느껴집니다. 보조기 제거 후 재활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한 달 동안 매주 각도를 늘려가며 팔을 펴고 구부리는 연습을 한 후 한 달 뒤에는 물리치료로 재활치료를 받게 되는 거죠. 수술은 아프고 무섭지만 한 달이 지나면 이전과 같은 통증이 없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이 기간 또한 감사함으로 보내보려 합니다.




두 아이들과 아내까지 돌보며 일하느라 애쓰는 남편이 있어 매일이 감사거리입니다. 아픈 아내에게 좋은 마음,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주며 불평 없이 자기 자리를 지켜주는 남편 덕분에 아픔도 감사가 되는 하루하루를 지내봅니다. 한 주가 지나고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이 다가오네요. 이번 주말도 행복 가득한 추억, 많이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감사가 넘치는 오늘을 살아가는 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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