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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Dec 12. 2022

남편과 여행계를 들었습니다.

보글보글 12월 2주 차 "자축"

올 한 해는 편찮으신 어머니 수술과 간병, 고3이 된 큰아이 돌보기로 유난히 분주하게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앵글이의 시험이 끝나고, 어머니께서도 힘든 시간을 지나 회복 단계가 되니 속이 시원합니다. 어려운 숙제를 마친 후련한 기분이랄까요? 그러다 문득, 수고한 날 위해 선물을 주고 싶어 졌습니다. 몸도 마음도 가벼운 지금 이 시간을 만끽하고 싶어 졌거든요. 그 마음을 알았는지 남편은,


"그래? 그럼 동해안 갈까?"

"정말?"

"그러지 뭐..."

"그럼 3년 만에 가는 여행이니까... 좋은 곳으로 갈래. 조식 필수!!"

"조식? 그냥 아침에 늦잠 푹 자고 간단하게 먹는 건 어때? 점심을 나가서 푸짐하게 먹으면 되지."

"무슨 소리? 여행은 조식이지..."

"그럼, 100만 원 보내줄 테니까 당신이 알아서 정해. 부족한 건 여보가 보태기다. 어때?"

"좋아~"


호텔 파먹기를 꼭 해보고 싶었다는 앵글이의 주문이 이어집니다. 동글이는 수영장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곁에서 울라울라 짱구춤을 춥니다. 전형적인 J유형의 기질을 백분 발휘해서 폭풍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두의 의견을 수렴된 숙소로 예약했습니다. 사실 마음에 둔 곳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오~ 엄마, 정말 여길 간다고?"

"그럼... 우리 이번에는 정말 관광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쉬고, 잘 놀다 오자. 계획 따위는 없어. 그냥 쉬는 거야."

"그게 될까?"

"왜?"

"엄마가 계획 없이 그냥 노는 게 된다고?"

"이번 '쉬기 위한' 여행이니까 꼭!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볼 거야."

 

그렇게 뚝딱 번개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멀미를 심하게 하던 동글이가 조금 자랐나 봅니다. 쉬엄쉬엄 가기도 했지만 동해까지 가는 동안 '언제 도착해?'를 남발하지 않고, 뒷좌석에서 흥얼흥얼 노래까지 불러주며 한층 분위기를 up 시켜 주었죠.


"여보~ 휴게소 들를 거야? 아니면 호텔까지 바로 갈 거야?"

"여행은 무조건 휴게소지. 가평 휴게소에서 쉬다 가자. 이영자가 추천한 '가평 잣 소고기국밥'을 먹어보고 싶어."

"그게 뭐야?"

"전참시에 나와서 소개해줬는데 맛있어 보이더라고."



우리는 가평 휴게소에 들러 각자 먹고 싶은 것을 하나씩 골랐습니다. 앵글이는 계란 라면, 동글이는 베트남 쌀국수, 남편은 사골 우거짓국, 저는 잣 소고기국밥을 받아 들고 인증샷을 찍었습니다.


"엄마, 나 한 입만 먹어봐도 돼?"

"그럼..."


밥을 좋아하는 동글이에게 덜어주고 나니 양이 턱없이 부족해져 공깃밥 한 그릇을 추가해 남편에게도 나눠주었습니다.


"엄마, 대박!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국밥은 처음이야."

"그치~ 정말 맛있지?"

"돌아올 때도 여기 올 수 있어?"

"그럼."

"그럼 돌아올 때 나도 잣 소고기국밥 먹을래."


휴게소만 들렀을 뿐인데도 모두가 대만족인 걸 보면 역시 여행에는 휴게소가 필수입니다.



체크인을 하고 객실에 들어서니, 눈앞에 바다가 펼쳐집니다. 정말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소나무 뷰, 레이크뷰, 시티뷰, 오션뷰로 나눠진 객실은 어느 곳이 보이냐에 따라 가격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코로나로 갇힌 2년과 가족 돌보기로 애쓴 나를 위해 선물하기로 했었고, 남편의 지원사격까지 있었기 때문에 오션뷰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곧 스물이 될 앵글이를 배려해 객실 두 개를 따로 잡고 커넥팅 신청을 했습니다. 예약할 때 부담됐던 마음은 아름다운 전망과 함께 사라졌고,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니 '잘했다' 칭찬해주고 싶어 졌습니다.


"엄마, 세상 태어나 이렇게 좋은 곳은 처음이야."


동글이의 감탄이 이어지


"누나도 처음이야."

"그래? 누나도 처음이야?"

"동글아, 아빠도 처음이야."


정말 덤 앤 더머가 따로 없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이었어요.


"우리 수영장에 가자. 너희들과 꼭 한번 가 보고 싶던 곳이 수영장이거든."


모두 함께 수영장으로 올라가니 바다 한가운데 있는 듯 한 착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환호성, 적당히 따듯한 수온, 맑은 하늘, 그리고 푸른 바다... 이 모든 것이 다 선물이 되어 주었습니다.

 


동해 바다가 보이는 객실을 예약한 건, 일출을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일출도 생각해 보았지만, 추위에 떨지 않고 느긋하게 일출을 감상하고 싶었거든요.


a.m.05:20 ~ 07:25 해 뜰 준비 부터 떠오를 때까지


알람을 부러 맞추지 않고도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이른 5시, 저 멀리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붉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자연의 신비보다 잠이 더 고픈 앵글이는 이불속에 폭 싸여있고, 저만 홀로 테라스와 객실을 오가며 사진을 찍어봅니다. 태양의 변화에 맞춰 한 장, 한 장 정성껏 말이죠.


"엄마, 내가 검색해 봤는데 오늘 일출 시간은 7시 18분이래."

"그래?"

"난 아빠랑 수영장에서 보기로 했어."


남편과 동글이는 수영장에서 일출을 감상한다며 옷을 갈아입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7시 18분이 되니 동글이의 말 대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닷가 날씨는 복불복이라 맑은 날이 많지 않은데 유난히도 맑은 아침이었고, 눈부시게 선명한 태양이 선물같이 다가왔습니다.


"앵글아~ 잠깐 일어나서 저것 좀 봐.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어!"


부스스 일어난 앵글이는 일출을 보며 '와아~~'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날리며 사진 몇 장을 찍더니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갑니다. 역시 자연을 아름답게 느끼고 감동하기에는 어리고, 잠이 더 고픈 19세 소녀입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집이 참 좋습니다. 여행은 준비할 때 더 흥겨운 것 같습니다. 여행에서 느끼는 새로움, 설렘도 좋지만 집이 주는 편안함, 안락함과 견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짜임새 있는 계획 없이 '쉼'만 가득해서인지 여유롭고 편안했습니다. 가족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나 봅니다.



일주일이 지난 오전 남편에게서 톡이 들어옵니다.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남편의 마음이 바뀌기 전 빠르게 카카오 통장을 개설해 계좌번호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첫 달 여행계가 시작되었죠.


어쩌면 여행을 하자고 모은 돈으로 여행이 아닌 각자의 바람을 채울 수도 있겠지만 시작은 반이라잖아요? 남편이 가고픈 곳 6곳, 제가 채워나갈 4곳을 떠올리며 매월 1일 채워져 갈 통장 잔고를 보면 힘이 날 것 같습니다.  


보글보글 12월 2주 차 "자축"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지칠 때도 있었습니다. 주변의 변화로 글쓰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주어진 시간 '월요일'을 채워나간 '나'를 위해 '자축' 여행을 떠나보았습니다. 맑은 날씨 덕분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기도할 수 있었고, 건강한 기운을 가득 채워 돌아왔습니다. 매 년 1월 1일, 일출을 보기 위해 동해로 발걸음을 옮기는 많은 관광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매일 떠오르는 태양은 떠오를 때마다 '새-해'가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이번 여행에서 '나를 축하하고 격려해주기 위한 새-해'를 맞이하고 돌아왔습니다.


마음이 같고 결이 다른 작가님들과 같은 주제, 다른 내용으로 함께 쓰는 매거진을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52주를 함께 해 주신 작가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2023년도 함께 해 주실 거죠?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보글보글과 함께하고픈 재미난 주제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댓글로 제안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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