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디/마조히스트로서 신과 인간의 고통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기독교인들에게 오간다. 다들 지옥을 반 종교적인 메시지로 해석한다. 옳다. 모든 예술은 해석에 열려있다. 내 종교는 기독교라 반-기독교 영화라고 해도 이해를 한다. 하지만 감독은 종교를 굉장히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공포를 원동력으로 삼는 모든 종교에 대한 통찰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에 쓰인 ‘대심문관’의 공포 종교에 대해 적어도 깊이 고민해 본 사람이다.
지옥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도로테 죌레의 “Suffering God”과 비슷하다. 미국의 급진적인 신학을 이끌고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원의 교수이다. 여기서 유니온 신학교의 신학이 거짓이네 사탄이네 해봐야 의미 없다. 심지어 도로티의 신정론은 두 세대 지난 윤리학이다.
도로티 죌레는 기존의 신관을 마조/사디즘이라고 공격한다. 신이 고통을 예정해 놓았다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만드는 사디스트가 확실하다. 또한 동시에 사디즘인데, 스스로 정한 규율에 따라 예수(자기 자신)를 고통받게 만든 마조히즘이라 말한다. 아주 거슬리는 말이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교리는 어떨지 몰라도,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종교는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구원받아야 하는 인간의 굴레를 설명하는 모든 종교 말이다.
지옥의 줄거리는 인간에 전혀 관심이 없는 마조히즘적인 세계관이 있다. 천사는 직접 인간에게 선고를 내린다. 몇 날 몇 시에 죽으면 지옥으로 간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옥의 사자들이 올라와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지옥으로 떨어뜨린다. 사람들은 여기에 공포와 전율을 느끼고 새진리교를 믿는다. 새진리교는 공포 위에 교리를 세운다. 공포를 통한 죄 없음, 사디즘의 신도들이다. 공포야 말로 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척도라고 말한다.
하지만 죄와 공포의 교리는 틀렸다. 갓난아기가 지옥으로 간다는 선고를 받았다. 무고한 아기다. 여기에서 신은 마조히즘으로 등장한다. 마조히즘의 신은 인간이 상태와 상관없이 찢어 발기는 신으로 등장한다. 새진리교는 죄라고 치장했지만, 신은 관심이 없었다. 딜레마에 빠진 새진리교가 원죄라는 개념을 도입하자고 하다가 개신교와 뭐가 다르냐고 말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당연한 죄 값으로 죽음은 처참한 죽음이 된다. 과연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죌레와 배우 박정민은 사랑을 해결책으로 내놓는다. 사랑 없는 종교는 그야말로 변태적인 모습을 보였다. 때리고 맞으며 구원받는 종교 말이다. 하지만 감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과 비슷하게 결론을 만든다. 신없는 종교인인 ‘대심문관’은 예수가 재림하자 돌아가라고 한다. 공포 종교로 세상을 잘 운영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인간이 알아서 한다고 말이다. 예수는 말없이 대심문관에게 의미심장한 입맞춤을 했다. 지옥으로 돌아가 보면 박정민은 사랑으로 아이를 구했다. 죌레도 사랑을 이야기한다. 죌레는 프랑스 철학자 시몬 배에게 영향을 받았다. 시몬 배는 고통을 사랑의 표상이라고 했다. 고통은 사랑이라는 못의 머리와 같다고 말이다. 예수의 사랑을 위한 고통에서 힌트를 얻었다. 신비로운 말인데, 고통을 사랑으로 해석하려 했지, 고통을 공포와 연결하지는 않았다. 죌레도 사랑이야 말로 구원한다고 말했다. 공포 종교의 비참함에서 사랑의 종교로 눈을 돌리라고 말이다.
지옥은 공포인가 사랑인가를 질문한다. 보고 보지 말고, 혹은 반종교적인 내용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마지막에 부활한 사람도 어쩌면 예수의 모티프이지 않을까? 전혀 사랑이 없는 종교에서 진짜 종교를 보여준 사람은 부활한 사람과 택시기사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