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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와 생각 Dec 24. 2021

깊이 있는 글쓰기를 위한 테크닉 4: 딜레마

조금은 까다로운 글쓰기; 1인 철학 출판사의 방법들.

질문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당연한 질문 말고 새로운 질문 말이다. 이런 질문은 딜레마에서 탄생한다. 딜레마는 왜 우리의 관심을 끌까? 딜레마는 우리 일상에서 발생하는 믿음과 삶의 불협화음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삶은 상식, 믿음과 충돌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라는 상식이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딜레마가 발생하기도 한다. 다음은 소크라테스의 빚에 대한 딜레마를 스탠퍼드 철학사전에서 요약했다.


In Book I of Plato’s Republic, Cephalus defines ‘justice’ as speaking the truth and paying one’s debts. Socrates quickly refutes this account by suggesting that it would be wrong to repay certain debts—for example, to return a borrowed weapon to a friend who is not in his right mind. Socrates’ point is not that repaying debts is without moral import; rather, he wants to show that it is not always right to repay one’s debts, at least not exactly when the one to whom the debt is owed demands repayment. 


플라톤의 국가에서 케팔로스는 진실을 말하는 것과, 빚을 갚는 것으로 정의를 규정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즉시 어떤 빚은 갚는 일은 잘못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예를 들면, 빌렸던 무기를 악한 친구에게 되돌려 주는 일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채무이행은 도덕적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채무이행이 늘 옳지는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적어도 채권자가 채무이행을 요구하는 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McConnell, Terrance, "Moral Dilemma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8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18/entries/moral-dilemmas/>.





늘 우리는 빚을 갚는 일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도덕적 딜레마를 제시했다. 전부가 그렇지는 않지만, 빚을 갚는 일보다 우선 남에게 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이다. 도덕적 딜레마만 있을까? 파열음이 많은 딜레마 중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도 있다. 과학이 발달해,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생겼으리라 생각하지만, 18세기 칸트도 이 문제를 자신의 책 ‘순수 이성 비판’ 맨 앞에서 다루었다. 신의 존재를 논하는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전개했다. 둘 다 타당한 논리로 읽힌다. 이를 토대로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긋는다. 신 존재에 대한 논쟁은 이성의 역할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도덕의 보편 논리로 신 존재를 증명하긴 했다.) 칸트는 이성의 역할에 선을 긋기 위해 신 존재 증명에 드러난 딜레마를 제시했다. 


딜레마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상식과 일상 사이의 ‘불일치’를 관찰하면 좋다. 불일치를 관찰하는 방법은 상식에 대한 과감한 질문이다. 실제로 딜레마를 보편과 개별의 틈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평소에는 당연하다고 여겼을 보편적인 사실에 대해 왜 타당한지 질문을 하다 보면 불일치가 보인다. 불일치를 확인하려는 행동을 다른 말로 ‘의심’이라고 부른다. 철학사에는 의심의 철학자 세명이 있다.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특히 니체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도덕 관습에 대한 의심을 품었다. 도덕 관습을 의심하는 자신에 대한 소회를 적은 적있다 (도덕의 계보 중). 니체는 의심이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통찰로 이끈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관찰, 의심, 도전이 딜레마를 설정하는 주요한 정신작용이다. 


딜레마가 늘 독자의 환대를 받지는 않는다. 깊이와 통찰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 불편한 감정을 유발한다. ‘당연함’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이 믿던 사실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불쾌하게 여긴다. 모든 사람들이 ‘저는 비판에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듣는 사람은 몇 없다. 딜레마의 성격도 비슷하다. 문제를 끄집어내 알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딜레마는 분명 글의 핵심이 될 위치에 있는데, 성격이 강해 사람들이 거부 반응을 보이면 뉘앙스를 누그러뜨려 볼 수 있다. ‘~을 해야 한다’라는 명령형 문체보다는 ‘~을 해보는 편이 좋다’ 같은 청유나, 차라리 돌려 말하는 방식이 좋다. 실제로 갑자기 선생을 자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처럼...).


요약해보면 딜레마는 관심을 끌고, 깊이 있는 글쓰기를 유도할 좋은 방법이지만, 사람들의 반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가르치는 문체 대신 청유나, 간접적인 문체를 사용하는 편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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