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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와 생각 May 08. 2021

집돌이, 집순이에 대한 철학적 이해

사소한 철학 단편 - 니체의 ‘공감을 참아내는 일’



"내게 인간과의 교제는 내 인내심에 대한 작지 않은 시험이다. 내 인간애는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내가 그들과 공감한다는 것을 참아내는 데 있다. 내 인간애는 자기 극복이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


"체념하는 마음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고독 속에서 지내보면, 사람들과의 교제를 거의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 교제를 더욱 맛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약속 취소 전화다. 미안하다고 다음에 보자고 했다. 아쉽다. 다행히 나갈 준비를 하기 전이었다. 아쉽지만 기뻤다. 집에서 편하게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집돌이의 전형이다. 내 성격은 내향과 외향을 오간다. MBTI 검사를 하면 I(내향)와 E(외향)가 번갈아 나온다. 한창 놀던 시절에는 E가 나왔고, 공부하던 시절에는 I가 나왔다. 요즘은 야외활동을 많이 하니 E가 나올지 모른다. 아니면 편집자 역할을 하고 있으니 I가 나오려나. MBTI는 절대적 지표를 제공하지 않는다. 참고만 한다. 그런데 내가 에너지를 얻는 방식은 한결같다. 혼자 시간을 보내야 활동 에너지를 얻는다. 책을 읽든, 멍하니 있든, 게임을 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향인가 보다.


집돌이, 집순이도 친구를 만나면 즐겁다. 단지 에너지를 생산하려면 혼자 있어야 할 뿐이다. 대화를 길게 하면 급 피로하다. 길게 대화할 때, 집콕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을 시험대에 올린다. 관계에서 오는 피곤함에 집돌이, 집순이 중에 장사는 없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의도적으로 집중한다. 집중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한 귀로 빠져나간다. 피로에 눈꺼풀이 쳐진다. 눈이 침침해진다. 친한 친구라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듣는 둥 마는 둥해도 이해해준다. 하지만 새로 만난 사람에게 이런 모습은 무례해 보인다.


니체의 말을 생각해본다. "내 인간애는 자기 극복이다." 정말로 인간애,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기 극복을 포함한다. 친구는 분명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간단한 대화에도 공감하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슬프면 위로해주고, 기쁘면 함께 기뻐한다. 타인의 경험을 내가 경험한 일처럼 느낀다. 서로 공감한다. 하지만 분명 자신의 일은 아니다. 그래서 공감하려면 타인에 대한 집중이 필수다. 문학처럼 표현하자면, 내가 친구의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집중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집중은 피곤한 일이다.


자기 극복은 공감을 참아내는 일이다. 얼핏 들으면, 니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공감을 참아낸다니. 공감하기 싫은가? 니체는 혼자 살기 원했을까? 세상에 누구도 혼자 살 수 없다. 니체도 주변에 사람이 있었다. 응원하는 사람, 힐난하는 사람들, 그리고 니체가 사랑했던 사람. 다만 사람 관계에서 공감 때문에 피로가 쌓인다. 이 피곤함을 니체도 아는 듯하다. 관계에서 오는 피로는 니체도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바그너는 니체의 두통이 자위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이야기를 참아냈다. 피곤한 삶이다.


집콕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공감을 통한 피로 누적은 당연하다. 친한 친구와 대화도 시간이 지나면 피곤하다.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내용과 상관없다. 몇 년 전 친구가 비트코인에 돈을 넣었다가 잃었다길래 깔깔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고 핀잔을 주었다. 최근 돈을 벌었다고 했을 때도 함께 기뻐했다. 원금회복은 아직이라길래 약간 비웃었다. 그래도 친구의 삶을 응원한다. 그리고 그의 기쁨에 공감했다. 굳이 힘들어할 때뿐 아니라 기뻐할 때도 공감대가 형성된다. 하지만 기쁨도 나누다 보면 지친다. 타인의 삶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공감을 참아낸다. 왜? 타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애다. 타인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여기에서 오는 피로를 참아내는 일은 자기 극복이다. "오히려 내가 그들과 공감한다는 것을 참아내는 데 있다." 힘들고 지치지만 남을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한다. 집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자신을 극복하며 공감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자기 극복으로써 인간관계는 고통일까? 집돌이 집순이가 집에 있는 이유는 편하기 때문이다. 이 편함을 통해 관계의 소중함도 깨닫는다. "체념하는 마음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고독 속에서 지내보면, 사람들과의 교제를 거의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 교제를 더욱 맛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니체와 달리 집돌이 집순이는 체념을 하지 않는다. 편하기 때문에 혼자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고독 속에 있기는 하다. 지나친 에너지 소비는 다음 날의 업무에 피해를 주니까. 그래도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기에는 충분하다.

미국에서 아내와 살면서 고립된 삶을 살았다.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냥 사람 만날 일이 없었다. 주말에 교회 가는 일이 전부였다. 게다가 그 교회에서 우리는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다양한 인종이 각각 자기 집으로 초대해 줬지만, 고립 자체를 해소하기에는 불충분했다. 그러다가 한 번 한국에 사는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잘 공부하고 있니?" 별 의도 없이 보낸 문자였다. 그런데 고립되어 있는 사람은 감사하고 따뜻함을 느낀다. 내 친구의 문자에 나는 순간 울컥했다.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정말 고마워서 며칠을 아내에게 자랑 겸 이야기했다. 니체의 말대로 관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친구의 안부인 사는 달았다. "사람들과의 교제를 거의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 교제를 더욱 맛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니체의 말이 이해가 된다.


일상도 그렇다. 대부분 바빠서 친구를 못 만난다. 간혹 몇 개월 만에 친구를 만나면 그렇게 반갑다. 집돌이 집순이뿐 아니라 다른 활동적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연스레 반가운 친구와 대화에 집중하게 되고 공감한다. 당연히 피곤하지만 이는 즐거운 자기 극복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즐거운 자기 극복이다. 그러니 집돌이 집순이는 집콕을 하더라도 관계를 소홀이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집콕 때문에 타인과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긴다. 밖으로 안 나온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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