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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와 생각 May 18. 2021

의심이 그렇게 나빠요?

사소한 철학 단편 - 니체에게 얻은 영감 '의심'

"동정과 동정 도덕의 가치에 대한 이러한 문제는 ( - 나는 현대의 수치스러운 감정의 허약화에 반대하는 자이다 -) 처음에는 단지 개별적인 문제, 의문부호 자체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한번 이 문제에 매달려 의문을 던지는 것을 배운 사람은, 내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그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어마어마하게 새로운 전망이 그에게 열리고 하나의 가능성이 현기증처럼 그를 사로잡으며, 온갖 불신, 의혹, 공포가 솟아올라 도덕에 대한 모든 도덕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 마침내 새로운 요구가 들리게 된다. 이 새로운 요구, 그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보자. 우리에게는 도덕적 가치들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가치들의 가치는 우선 그 자체로 문제시되어야만 한다.


- 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의심이 그렇게 나쁜가?


어릴 때는 친구를 만나러 교회에 다녔다. 나이가 들고 보니 교회에서 말하는 이런저런 교리를 의심 없이 듣기 힘들었다. 의심하고 고민을 하며 질문을 했다. 대답을 잘해주시는 분도 많았지만, '의심'하지 말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의심은 악마가 주는 생각이라고 했다. 흠...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이다. 어떻게 기독교인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나는 의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의심에는 이점이 있다. 사물 혹은 사태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 또 다른 이점은 내가 공동체나 사회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독립된 개인이 될 수 있는 긴장을 만들어 준다.  



니체, 의심의 왕좌


철학사에는 의심의 철학자 셋이 있다.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이다. 셋은 각각 다른 분야를 의심했다. 프로이트는 의식구조에 대한 의심을, 마르크스는 사회구조에 대한 의심을, 니체는 서양철학의 구조에 대한 의심 했다. 단연 의심의 왕좌가 있다면 셋 중 니체가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서양철학사의 근간을 이루는 진리, 기독교 사상, 보편 도덕을 의심을 했다. 서양 사상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니체의 철학이 워낙 급진적이다 보니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니체는 보편 도덕 비판을 하며, 의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의심 대상은 동정심인데, 이를 허약한 감정이라고 말한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먼저 소개한다. 위의 본문 앞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동정과 자기희생의 가치를 두둔한다며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이어 플라톤, 스피노자, 라 로슈푸코, 칸트는 동정의 가치를 경시했다고 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동정의 가치에 동의하겠지만, 니체는 동정의 가치를 의심하고 허약한 감정이라고 비판한다 (자기희생의 허약함에 대해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그리고 의심을 통해 드러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어마어마하게 새로운 전망이 그에게 열리고 하나의 가능성이 현기증처럼 그를 사로잡으며, 온갖 불신, 의혹, 공포가 솟아올라 도덕에 대한, 모든 도덕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관습


의심은 우리에게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다. 기존에 있던 관습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고 가능성을 열어준다. 의심에 대해 생각해 보기 전에 관습에 대해 생각해보자. 관습은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편이다. 장점은 내(주체)가 공동체나 사회에 쉽게 동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히 도덕을 관습으로 습득하기도 한다. 논리적 추론을 통해 습득하기도 하지만 타인의 행동을 모방해 습득한다. 아주 가깝게 서로 인사하는 모습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방식을 답습한 결과다. 허리를 구부려 90도로 인사하는 방식으로 인사한다. 왜 이렇게 인사하나? 이유는 모르지만 이렇게 인사해야 공손하다고 답습했다. 이렇게 우리는 사회의 일원으로 공동체에 동화된다. 하지만 관습은 사유를 무디게 만든다. '당연하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는다. 인사의 근원은 무엇일까? 대답하기 어렵다. 당연하게 생각한 행동을 갑자기 의식해 논리로 따져보려 하면, 그 의미가 아리송해진다.


내가 교회를 다녔을 때도 비슷했다.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듣는 이야기를 이해하기보다 관습으로 터득했다. 교회라는 작은 공동체 내에서 통용되는 관습이 있다. 관습으로 먼저 교회생활 습득하니, 교회에서 행하는 일이 딱히 이상해 보일 리 없었다. 찬양을 하면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면 기도를 했다. 딱히 각각의 행동, 더 나아가 교리에 대해 의심을 해본 적 없다.



의심, 새로운 가능성.


의심은 개인의 의식활동으로 당연한 사실에 질문하기 전 행위다. 지적 활동이니 행위라고 하겠다. 니체는 의심을 통해 새로운 전망이 열린다고 했다. '당연한' 관습을 벗어나면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정을 선하다고 여긴다. 과연 동정은 선한가? 나는 동정심 때문에 거지에게 적선을 했다. 지금이야 차를 타고 다녀서 잘 마주치지 않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시절에는 자주 만났다. 지금도 계실까? 아무튼 동정은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 모호하다. 구걸하는 사람이 거지가 아니고 그런 척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리고 내가 그 거지에게 적선을 했다면? 이런 경우 내가 동정심 때문에 적선을 했지만, 금전을 손해 보게 되었고, 불필요한 감정을 소비하게 되었다. 돈을 줘서 마음의 면죄부를 얻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럴지라도 불필요한 일을 하게 된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 한해서 동정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았다.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동정을 당연히 선하다고 여기면 동정의 새로운 이해를 발견할 수 없다. 그저 동정의 긍정적인 면만을 답습할 뿐이다. 하지만 의심을 한다고 바로 새로운 이해나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다. 니체는 전망, 현기증, 가능성이라고 표현했다. 세 단어 모두 명확한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보지 않은 길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의심은 길을 터주는 역할까지 한다. 그야말로 가능성이다. 그 길을 따라갈지 말지는 개인에게 달려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의심 때문이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기독교의 교리를 넘어서 새로운 길을 택하게 해 주었다. 교계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말보다 칸트의 도덕을 통한 신 존재의 가능성, 혹은 슐라이어마허의 인간 심리 분석을 통한 신의 존재 가능성, 혹은 세상을 무의미하게 보는 비관주의를 넘어 신(보편)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조던 피터슨의 논박이 더 와 닿았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남았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은 계속한다. 


의심, 잠시 진정한 개인이 되는 길


의심은 공동체에서 개인을 분리시킨다. 관습은 공동체의 특성이다. 사회나 문화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가깝게 동아리를 가더라도 그들이 따르는 관습이 있다. 나는 게임을 굉장히 좋아한다. 한 게임을 집중해서 하기보다 다양한 게임을 하는 편이다. 각 게임의 멀티플레이를 접속해보면, 그 게임 속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하는 관습이 있다. 스타워즈 게임 멀티플레이를 하다 보면 제다이는 무조건 시스와 1 대 1로 싸워야지 1 대 다로 싸우면 욕을 먹는다. 시스에게 그런 정의로운 감정이 어디 있는가! 시스는 원래 나쁜 놈인데. 나는 시스 편이 좋다. 동아리도 비슷하다. 운동 동아리 속에도 여러 규칙이 있다. 하지만 개인이 공동체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관습은 힘을 잃는다. 공동체를 나온 개인은 아무 거리낄 것이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공동체를 벗어나 개인이 되는 방법을 신앙에서 찾았다. 하지만 니체는 의심에서 찾는 듯하다. 


완벽히 홀로 서는 개인은 없다. 누구나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의심은 잠시 개인을 사회에서 분리시킬 뿐이다. 이 분리는 단지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분리일 뿐이지만, 공동체와 감정적 거리를 벌려준다. 니체도 의심은 처음에 개별적인 질문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니체와 같은 동류의 길을 걷게 된다고 말한다. 어쩌면 의심을 통해 개인이 된 사람들이 비슷한 과정을 통해 공통의 이해를 갖게 된다는 말 아닐까? 그렇다면 이전의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가 된다. 적어도 관습을 비판했기 때문에 자기 공동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공동체가 의심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의심은 공동체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에 대한 도전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지도 해답을 내놓지도 않는다.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심은 개인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아주 잠깐이지만 개인과 공동체와 거리를 벌려준다. 둘 사이 긴장이 생긴다. 그리고 개인들이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면 이전과는 다른 공동체가 된다. 어쩌면 의심이야 말로 각각의 아브락사스가 알을 깨고 사회로 나오기 위한 방법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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