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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와 생각 Jun 25. 2021

아들, 알려줘서 고마워. 영원이 무엇인지.

니체가 육아 조언자입니다.

사랑의 영원함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사랑이고,
그 존재가 영원하길 바라는 소망을 내포한다. 




아들이 잠들기 전, 같이 이불 위에 엎드려 책을 읽는다. 아들은 한글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읽어준다. 어제는 아들과 책을 읽는 시간이 늦었다. 운동을 조금 오래 했기 때문인데, 아들은 아빠와 책을 읽겠다고 졸린 눈을 비비며 기다렸다. '아빠와 여행을 갔다가 아빠를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를 읽었다. 아빠가 아이를 걱정해 작게 쪼그라드는 이야기다. 그림이 아기자기했다. 그림을 살피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가 잠들려 했다. 배게에 엎드려 눈이 반쯤 감겼는데, 너무 사랑스러워 잘 자라고 등을 토닥여주면서 책을 읽었다.


아들은 나에게 사랑의 영원에 대해 피부로 느끼게 한다. 변치 않는 사랑은 누구나 바라는 소망 중 하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변하면 사랑이 아니지.' '변해도 사랑이지.' 사람마다 사랑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여기서 사랑이 무엇인지에 관한 여러 정의를 논박하지 않겠다. 어쨌든 주장하는 글이지만, 경험상 얻은 철학적 통찰을 기술하려고 한다.


사랑은 인간과 관련된 것이다 (나는 '~것'같은 환원하는 표현을 싫어하지만 여기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부득이 사용한다). 나는 사랑이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없으면 사랑이 있을까? 중세 철학자를 비롯한 다수의 사람이 그렇다고 하겠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사랑은 어떤 의무, 감정, 행동 혹은 인간과 관련된 어떤 것을 의미하는 추상 단어다. 이외에 더 많은 것을 포함할 수 있다. 사람마다 의미가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대충 가려낼 수 있다. 아주 복잡한 몇몇 문제와 동물에 대해서는 예외로 두자. 사랑이 무엇이든 사람과 관련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주체(사랑하는 사람)와 대상(사랑받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표현에는 주체와 대상이 함축되어 있다. 인간과 관련된 특정한 행동을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은 누구의 사랑, 누구를 향한 사랑이라 표현해야 정확하다.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사랑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아! 분명 짝사랑이 있기는 하다. 내리사랑도 있고. 자기 사랑도 있고.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내가 아들을 사랑하는 일,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일, 혹은 가족 친구 등등. 종교적 의미도 그렇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일, 혹은 반대로 인간이 신을 사랑하는 일. 사랑은 행동, 감정이기도 하지만, 주체와 대상을 포함하고 있다. 정말 포괄하는 의미가 다양한 단어다. 그러니 한마디로 정의하려는 일은 접어두자. 일단 존재와 관련있는 부분만 생각해보자. 주체와 대상을 포함한다는 뜻은 존재를 전제한다고 생각해도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랑에 영원을 붙이면 의미가 복잡해진다.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하면 보통 나의 영원한 사랑, 부모의 영원한 사랑, 신의 영원한 사랑, 등등을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해 생각한다. 연인의 사랑을 영원하다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 사랑하는 사람이 변하고 떠나기 때문이다. 열열한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면 사랑이 변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이에 다른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나도 사랑은 변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들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며 사랑의 영원에 대한 이해가 변했다.


사랑에 대한 관점을 사랑하는 사람에서 사랑받는 사람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 일단 아들이라는 사랑의 대상은 확보했다. 사람은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변하면 사랑도 변한다. 하지만 사랑받는 사람의 존재로 관점을 이동시키면 변화가 무색하게 사랑의 영원은 가능할지 모른다. 아들에 대한 나의 마음을 면밀히 살펴보면, 아들의 변화도 기꺼이 사랑한다.아들의 변하는 모습도 사랑 아래 포섭이 되기 때문이다. 아기였던 아들과 지금 6세의 아들은 분명 다르다. 아들은 변했다. 나도 변했다. 나와 아들은 늘 변해가는데, 아들을 향한 사랑은 이상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변하는 모습이 사랑으로 이해된다. 어떨 때는 신나 하고 애교를 부리다가도, 삐지기도 하고 나쁜 일을 해 혼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다양한 모습도 사랑으로 이해하게 된다. 


사랑의 영원함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사랑이고, 그 존재가 영원하길 바라는 소망을 내포한다. 아들은 변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들을 사랑한다. 아들의 성격이나 특성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아들의 있음 자체를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아들의 '있음'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의 영원함은 아들의 존재를 사랑하는 신비이다. 아들의 '있음' 자체가 좋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영원한 사랑은 대상의 존재가 영원하길 바라는 소망도 포함한다. 나의 어릴 적 꿈은 영원히 사는 삶이었다. 위인전에라도 실리면 사람들이 영원히 기억할 테니 영원히 살 수 있는 것과 같다 생각했다.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매번 위인전에 기록되는 거라고 했으니까 (철학적 성향은 타고나는 건가 싶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영원히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아들이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아들의 존재가 내 삶으로 들어오며 점점 나를 밀어냈다. 자발적으로 내 삶에 아들의 존재에 대한 자리를 마련했고 내어줬다. 그러다가 아들의 존재는 점점 커져서 아들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아들 없는 세계는 이미 나의 세계가 아니다. 나의 세계는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아들이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자리를 잡았다. 사랑의 영원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대상이 영원하길 바라는 소망이라고 부르겠다. 당연히 생물학적으로 아들도 영원할 수 없다. 어디나 아들의 존재를 지우려는 위협이 있지만, 그런 위협에서 나보다 아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 사랑하는 대상이 영원하길 소망한다. 아들이 무단횡단을 하다가 차에 치일 뻔하면, 화가 나는 이유는 내 세계에 위협이 닥쳤기 때문이다. 아들을 잃을 뻔 했다는 나에 대한 분노다. 아들을 다그치기는 하지만. (당연히 기독교인 나에게 종교에 대한 지적 통찰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기독교도 아버지와 아들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때문에. 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신도 내가 영원 바란다고 생각한다.)


아들이 알려주는 사랑의 영원은 이렇다. 사랑이 영원하다면 그 사랑은 존재를 향한 사랑이다. 변하는 모습까지도 다 포섭하기에 있음 자체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원한 사랑은 대상의 존재를 사랑하기에 대상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까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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