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이와 생각 May 06. 2021

분노 앞의 어색함

사소한 철학 단편 - 니체 '르상티망'

"고귀한 사람은 신뢰와 열린 마음으로 살지만, '르상티망'을 좇는 사람은 자신감 없고, 순진하거나 정직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그의 영혼은 눈을 흘긴다."


"'르상티망'을 좇는 사람은 비밀장소, 아무도 모르는 길, 그리고 뒷문을 좋아한다. 은밀한 모든 것은 그가 그의 세계, 그의 안위, 그의 여가가 되도록 유도한다. 그는 침묵하는 법, 잊지 않는 법, 임시로 자기 비난과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기다리는 법을 안다. '르상티망'을 좇는 사람의 부류는 결국 고귀한 사람보다 영리해지는데 사로잡힌다. 더 위대한 수준의 영리함을 칭송한다."


- 도덕의 계보, 니체, 카우프만의 영문 번역을 글쓴이가 재번역 (원문은 가장 아래 삽입)

읽는 사람에 따라 이 글이 불편할 수 있다. 그래서 고해성사부터 시작한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반지하 단칸방에 살았다. 버섯이 자라고, 곰팡이가 피는 집에서 자랐다. 고 2 때부터 아토피 피부염이 심해졌는데, 부모님은 그 집 때문이라고 생각하신다. 그런데 그 집 때문은 아니고, 어떤 부분에서 지나치게 예민해 생기는 내 마음의 걸림이 피부염으로 발진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신경쓸 일이 많으면 발진이 생긴다. 아무튼 어릴 때 상당히 가난했다. 교회 친구와 동대문에서 컨버스 비슷한 고무신을 만원에 사서 신고 다녔다. 원래는 컨버스를 사고 싶었는데 돈도 없고, 우동도 먹고 싶어서 만 오천 원 정도에 샀다. 대학 때는 지하철 표 살 돈이 없어서 등교하지 못하기도 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아서 등교를 못 한 사실은 모르신다. 독자와 나의 비밀로 묻어두자. 아무튼 무척이나 가난했다. 왜 가난한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까? 면죄부를 받기 위함이다.


결혼 이후 삶이 급격하게 편해졌다. 아마 중상층보다 약간 높은 수순의 경제 수준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내 노력은 아니고, 양가 부모님의 노력이었다. 특히 장모님과 장인어른께 큰 빚을 졌다. 유학도 다녀올 수 있었다. 다소 운이 좋았다고 당시와 지금을 평가한다. 가난과 부유의 양극을 오갔다.


대학원 유학 시절, 유학생끼리 학교 지하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나에게 어색한 분위기가 자주 연출됐다. 부자에 대한 의견 때문이었다. 일단 유학생의 경제상태부터 말하는 게 도움이 될 듯싶다. 유학생은 돈이 없다. 학비를 내고 나면 생활비가 빠듯하다. 물론 학비는 한국보다 저렴하다. 가장 비싸게 학비를 냈을 때가 한 학기 5백만 원을 낸 적도 있는데, 이는 한국 학비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다. 대부분 장학금을 받고 3백 초반을 냈다. 다른 유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타지의 생활은 돈이 많이 들고, 학교에서 일하고 지원을 받으며 사는 유학생이 다수였다. 차이가 약간 있긴 하지만. 그리고 신학과 특성상 타 과에 비해 조금 더 검소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유학생이 모두 부자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자.


검소한 유학생 무리 중 부자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부자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생활에 여유가 있던 나는 어색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분개해봐야 같은 유학생끼리 유대가 틀어질게 뻔했다. 한 번은 반론을 제기했다가,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남의 삶도 모르면서... 며칠 전 인스타라방을 시청했다. 라방에서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채팅 로그가 있었다. "부자는 도덕적이기 힘들 것 같아요. 그런데 부자는 하고 싶어요." 차라리 이런 대화가 좋다. 분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자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담담히 말한다. 그리고 부자가 하고 싶다는 말에서 위트를 보였다.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말하는 기술이다. 


니체는 르상티망을 정의한다. 르상티망의 사람은 은밀한 사람이다. 자신의 분노를 감추고 있는 사람이다. 분노를 감추고 기회를 노린다. 가끔 자신이 속한 그룹이 다수가 되거나 힘이 생기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자신의 논리적, 도덕적 우위를 설파한다. 정치나 경제 분야에서 이런 전략을 사용한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그룹, 혹은 타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르상티망의 사람이 모두 정직하고 순수하다고 할 수 없다. 르상티망의 사람은 타인의 권력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르상티망의 사람은 '노예 도덕'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노예 도덕은 주인에게 억압받으며, 권력을 가진 이의 반응으로 생긴다. 주인으로부터 파생된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주인이 부과한 의무를 따라 행동한다. 이중성을 보인다. 마치 자본주의를 힐난하며 매일 스타벅스를 주문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노예도덕은 주인도덕과 상극을 이룬다. 주인 도덕은 권력을 가진 이의 도덕으로, 주인은 선하다 선언한다. 그리고 자신의 잣대에 따라 타인을 판단한다. 


그렇다면 주인 도덕은 선한가? 주인은 자신의 상태를 정당화하고, 타인에게 의무를 부과한다. 선하지 않다. 주인의 도덕 의무를 남에게 설파하고 부과하는데 어떻게 선할 수 있는가? 현대의 언어로 표현하면, 압제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런 도덕적 의무를 싫어한다. 허황된 생각이라고 한다. 선하지만 않다. 종교는 오랜 기간 주인의 역할을 감당했다. 주인 도덕을 부과해 왔고, 이로 인해 종교 내외에서 노예 도덕이 발생하기도 했다 (글쓴이의 변: 나는 종교-그리스도교-에 대한 니체의 의견을 수용하기도 하지만 반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은 사회경제적 용어가 아니다. 니체는 누가 노예이고 주인인지 계층에 따라 가르지 않는다. 오히려 둘은 정신에 관련한 용어다 (Robert C. Solomon).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도 노예 도덕을 따르기도 한다. 경제적 우위를 점했지만 타인에 대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이들 말이다. 반대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지만 '주인 도덕'을 가진 사람이 있다. 종교인들 중에 이런 이를 자주 본다. 타인을 도우며 특정 종교의 도덕적 의무를 설파한다. 노예•주인 도덕이 사회경제적인 위치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마음에 대한 이야기임을 증명하는 사례다. 니체 또한 르상티망이 마음의 문제라고 두 번 정도 강조했다. "깊이 내재된 분노와 무력한 자의 복수심 (도덕의 계보 1:10, 글쓴이 번역), " "어두운 곳에서 노려보는 감정으로 복수와 분노이며, 내재된 것 (도덕의 계보 1:13, 글쓴이 번역)"이라고 한다. 깊이 내재되어 있고, 감정으로 복수와 분노는 당연히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이 두 도덕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마음의 수레바퀴이다. 주인 도덕도 노예 도덕도 선과 악으로 나뉘지 않고, 그런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르상티망의 사람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무리에서 부자에 대한 분노가 고개를 들면, 어색함을 감출 수 없다. 르상티망의 사람을 대면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딱히 돈을 열심히 벌어본 적이 없다. 모든 부자가 부도덕한 지 논증할 수도 없다. 어떻게 하면 돈을 획기적으로 버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르상티망의 대상이 마치 나라는 기분이 든다. 칼로 살살 긁는 느낌이 드는데, 그러면 상대와 다소 어색해진다.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대화의 기술도 없어 주제를 돌리지 못한다. 돌아와서 분노하는 사람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노예라고 생각하나?'


친구들은 내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무리에서 부자 이야기를 하면 내가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간혹 분노가 심해져 험한 말을 하면 노력하는 가족을 욕보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도 말을 아끼려 노력한다. 모든 논리에는 그렇고 그런 정당함이 있고, 논리보다 관계가 중요하니까. 혹은 내가 노예로서 동지라고 생각하는지 의문이 든다. 혹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내가 그들과 똑같은 비전을 공유하는 노예라고 여기는 건지 궁금해진다. 친구들은 내가 사상의 독립을 추구하기에 그렇지 않음을 안다. 사상적 자립성은 주인 도덕의 특성이니까 어쨌든 노예도덕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분노는 나를 어색하게 만든다.  


반대 예도 있다. 다소 잘 사는 친구들이 민중에 대해 폄훼하는 소리를 들으면 언짢다. 물론 친구들이 자신의 답답함을 토로하는 이유는 알지만, 분노는 나에게 이질적이다. 대부분 자신과 의견이 다른 민중이 다수요, 잘 사는 친구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을 때 그런 말을 한다. 모든 사람이 어떻게 같은 의견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이게 정당한 분노인가 싶다. 내가 너무 나이브한지 모른다.


양쪽의 모두를 생각할 때마다 르상티망을 생각한다. 이야기에서 르상티망이 고개를 들면, 그 장소와 시간을 탈주하고 싶다. 늘 어떤 분노는 나를 어색하게 만든다.






"While the noble man lives in trust and openness with himself, the man of ressentiment is neither upright nor naive nor honest and straightforward with himself. His soul squints..."


"[The man of ressentiment] loves hiding places, secret paths and back doors, everything covert enitces him as his world, his security, his refreshment; he understands how to keep silent, how not to forget, how to wait not to be provisionally self-deprecating and humble. A race of such men of ressentiment is bound to become eventually cleverer than any noble race; it will also honor cleverness to a far greater degree (Nietzsche, on the Genealogy of Morals)"

작가의 이전글 독립하려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