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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와 생각 Apr 30. 2021

독립하려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

사소한 철학 단편 - 니체의 '자신의 길들'




내가 너희에게 같은 모험을 하길 권하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또는 같은 고독을 권하리라고. 왜냐하면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길들'이 그것을 초래한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위험, 우연, 악의 악천후 중에서 그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그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위해 자신의 길을 갖고 있다.

-유고, 니체





글로 밥벌이를 하겠다고 결심하기 전, 교회에서 성직자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보내는 날도 적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타인에게 노출된 삶을 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결국 성직의 삶을 포기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출판사를 등록했다. 아직은 수익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일을 돕고, 아내의 수익에 의존도 하며 생활하고 있다. 삶이 모험이긴 하나 의존하는 모험이다.


니체는 모험가다.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고,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 고독 속으로 들어갔다. 사상적 모험을 하기 위해 외부와 단절했다. 육체적 모험은 아니었지만, 위험한 모험이었다. 서양철학의 전통을 뒤집어엎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수업시간 교수님은 철학사에 세명의 의심왕이 있다고 했다. 막스, 니체,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생각이 안 난다. 흄이었나 데카르트였나. 데카르트에게 한 표. 니체는 서양 철학을 통째로 의심했고,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이런 모험은 오직 니체만이 할 수 있는 모험이다. 니체는 자신의 고유한 모험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에게 같은 모험을 하길 권하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누구나 인생을 걸고 모험을 한다. 각자가 자신의 길을 간다. 인생의 여러 교차로가 있지만 결국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만나 내 출판에 대한 결정을 책임 지울 수 없다. 종교인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 내 삶에 대한 책임 말이다. 자신의 길에서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내 책임을 전가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돕고사는 인생이라 하지만, 삶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 진다. 이럴 때 차라리 운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운명을 삿대질하며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 


속내를 털어놓는 일과 의존은 차이가 있다. 속내를 털어 놓아도 책임은 자신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경험상 의존은 책임을 전가한다. 나는 결정을 할 때 자꾸 아내에게 묻는 습관이 있다. 종교인을 그만 둘 때도, 사업을 하며 결정하는 순간에도 아내에게 물었다. "그만할까?" "투자할까?" "대출받을까?" 당연히 조언을 해준다. 아이러니인데, 그럴 때마다 아내를 핑계 삼는다. "거봐 관두지 말걸." "더 일찍 관둘걸." "그런 결정하지 말자니까." 아내는 화가 나서 그만 물어보라고 한 적도 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했다. 나는 독립적인 사람인가? 나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맞나?


독립을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을 타인이라 생각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길을 가면 되니까. 하지만 정말 독립된 사람은 타인을 극복한 사람인가? 의존은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보면, 극복해야 할 대상이 명확히 보인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누구나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이나 신에게 의존한다. 의존은 나쁜 본성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부모에게 의존하고, 돈에 의존하고, 종교에 의존한다. 아들이 나에게 더 의존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가끔 힘들기는 하지만. 다시 질문을 던진다. 의존하지 않기 위해 타인을 극복해야 할까? 독립하고자 타인이나 신을 지운다고 독립을 하게 되나? 


누구나 아는 사실이 있다.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꼭 카톡을 삭제하는 사람이 있다. 나 시험이니까 카톡 하지 말라고 카톡 탈퇴를 한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의존하는 대상을 제거한다. 내가 그랬다. 이렇게 카톡을 탈퇴한다고 의존하는 마음이 사라질까? 나는 카톡을 지우고 게임을 했다. 허한 마음을 게임으로 달랬다. 의존하는 본성을 약화시키지 못했다. 의존의 대상을 지워도 독립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묻는다. 의존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나 자신.


의존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다. 타인은 의존을 요구하지 않는다. 타인은 위로를 해주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의존하면 타인은 저 멀리 떨어져 나간다. 자신을 타인에게 강요하면 스토킹과 뭐가 다른가. 의존에 대한 문제는 돌고 돌아 나에게 돌아온다. 결국 독립에서 핵심은 자신을 극복하는 일이다. 니체는 말한다. "자신을 위해 자신의 길을 간다." - 슐라이어마허는 독립된 자아에 반대하겠지만 - 독립하고 싶다면, 의존하고자 하는 자신을 돌아보자.


자신을 극복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독립된 사람이다. 사람은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분명 완벽한 독립은 없다. 그리고 의존의 정도를 수치화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 지나치게 의존하는 이는 무엇을 봐야하는가? 그 의존을 하는 사람도 나고, 이를 극복해야 하는 사람도 나다. 독립하는 용기는 자기 극복의 용기다. 의존하는 자신을 도려낼 용기가 없다면 독립은 가능할까? 


나도 독립을 준비한다. 타인에게 의지하는 나를 극복하려 한다. 자꾸 안주하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한심해 보인다. 아내의 벌이에, 장인어른과 부모님의 원조에 나태해진 나를 극복하려 한다. 어쩔 수 없이 경제적 의존을 하고 있지만, 가시방석으로 생각해야겠다. 만족하는 나에게 니체는 자신의 길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너는 자신을 위해 자신의 길을 갖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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