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관이 지닌 특수성과 어려움, 그리고..
요 근래 업무에 치여 브런치도, 유튜브도 통 관리를 못했습니다. 10월에는 초과근무 법정 한도시간인 57시간을 꽉 채우다 못해 넘겨버렸는데요. (공무원은 근로기준법의 적용대상이 되지 않아, 야근을 아무리 많이 시켜도 위법이 아닙니다. 법정 한도라는 건 어디까지나 57시간까지만 수당을 지급하겠다는 의미죠. 선배들은 57시간을 넘겨도 꼭 초과근무 기록을 남기라고 조언합니다. 그래야 ‘과로사’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요.) 거의 한 달 내내 매일 밤 11시 넘어 퇴근하고, 심지어 개천절(10/3)과 한글날(10/9), 임시공휴일(10/1, 국군의 날)까지 몰려 황금연휴로 불린 10월 초에도 회사에만 있었습니다.
최근 공무원의 인기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최근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오래된 일입니다. 몇 달 전에는 유튜브를 통해 행정고시를 비롯한 공무원시험의 경쟁률이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고, 그래서 행정고시 진입하기엔 이만한 때가 없다는 영상을 올린 적도 있는데요. 공무원의 직업상 어려움과 문제점은 짚지 않았기에, 단순히 경쟁률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이 직업을 추천하는 것처럼 비칠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갑자기 저에게 "공무원 어때요? 추천할만한가요?"라고 물으면 선뜻 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 직업은 한가하지도 않고, 업무가 쉽지도 않고, 보상이 큰 것도 아닙니다. 저도 평생 공무원만 하다가 삶을 마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항상 새로운 도전을 즐기고 발전을 추구하는 성격이라, 지금의 일을 통해 더 이상 성장하기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미련 없이 떠날 예정입니다. 다만 아직은 일에서 배우는 점도, 느끼는 점도 있어 남아있는 것이고요.
공무원을 추천한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제가 왜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택했는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너는 왜 굳이 공무원이 되었냐'는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지루한 업무'의 표상으로 공무원의 일들을 떠올립니다. 매일 반복적으로 보고서를 쓰고, 민원을 처리하는 등의 일 말이죠. 정확히 보셨습니다. 공무원의 업무는 대부분 지루하고 따분합니다.
그러나 직급이 높아질수록 점점 '권한'이 생기고 이 권한 속에서 '지금껏 아무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을 펼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이제 막 행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하는 수험생들에게 왜 고시를 준비하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스스로 정책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으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어서요
위 답변을 현직자들이 본다면 쓴웃음을 짓겠지만, 그 이유는 위의 답변이 사실과 달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무관의 경우 중앙부처에 배치되어 중요한 정책의 방향을 최초로 결정하고 새로운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니까요. 그럼 왜 쓴웃음을 짓냐고요? 이러한 정책결정 권한과 함께 '필요 없고 무의미한 일'이 많이 딸려오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이 같은 '권한'을 활용해 뜻을 펼칠 수 있는, 소위 '보람 있는 일'의 비중은 전체 업무에서 약 3% 정도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97%는 똑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취합 기관의 양식이나 보고받는 상급자의 스타일에 따라 바꿔 제출(양식 바꾸는 것이 쉬워 보이죠? 절대요. 그때그때 수차례 내부보고를 거쳐 보고서를 다듬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닙니다. 쉼표 하나, 따옴표 하나까지 수정하다 보면 참기 어려운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하거나, 상위 기관, 국회 등에서 사업 내용이 궁금하다고 할 때 같은 설명을 수십번 반복하는 일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연말에는 사업 결과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고, 예산 실집행내역을 제출해야 하며, '신년 업무계획'도 새해가 밝기 전에 짜야합니다. 필요한 곳에는 예산을 주지 않다가, 연말에 수십억원 규모의 신규사업을 발굴하라는 예고없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정부에는 수많은 옥상옥(屋上屋) 조직들이 있어서 여기저기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아니 침몰해 버릴 걸 알면서도 손쓰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죠.
국정감사 기간에 국회에서 들어오는 질의에 답변하는 일도 사무관을 비롯한 실무자들에겐 '현타'가 오는 일입니다. 국정감사는 헌법에 보장된 국회의 권한으로, 올바른 국정운영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절차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국회의원들의 질의가 국정감사 바로 전날 몰아친다는 데에 있습니다. 국정감사는 국회의원들이 장차관에게 해당 부처의 업무와 관련된 의혹이나 문제점의 진위를 파악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연례행사(?)입니다. 한 부처의 업무 범위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의원들은 사전에 미리 질의 내용(질문 목록)을 던집니다. 그런데 답변할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예를 들어 국정감사가 10월 8일 화요일에 진행된다고 해볼까요. 10월 8일 오전 10시부터 진행되는 국정감사의 질의는 언제쯤 들어올까요? 놀랍게도 전날인 10월 7일 월요일 저녁 10시, 11시부터 들어옵니다. 질의는 각 의원실에서 부처로 보내주는 것인데, 자정을 넘기기 전에 주면 양반(자정을 넘겼다고 상놈이라는 말은 아닙니다)입니다. 새벽 2시, 3시, 정말 늦으면 5시~7시에 주기도 하고, 어떤 의원실은 '질의를 보내주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가 오전 8시쯤 질의를 보내주기도 합니다. 질의 답변은 새벽 몇시가 되든 동트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저는 새벽 4시반에 퇴근해, 두시간 자고 일곱시 반까지 회사에 출근한 적도 있습니다. (국감 당일 사무실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다들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거든요) 사정이 이렇기에 국정감사 전날엔 1박2일 캠핑가는 기분으로 회사에 출근합니다.
국회의 갑질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국정감사의 취지는 '장관이 부처 업무를 얼마나 속속들이 외우고 있나'를 보는 게 절대 아닙니다. 장관은 소관부처의 업무를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125조 원의 예산을 운영하는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5억 원에 불과한 소규모 사업의 최근 3년간 예산 집행률을 물으면 실무자의 자료 서포트 없이는 답변이 불가능한 게 당연합니다. 국정감사의 취지는 국회의원이 국민의 대리인으로서 '해당 부처의 업무가 얼마나 문제없이, 당초 취지대로 진행되었는지를 확인'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정감사 일자가 확정된 직후 질문을 던져, 부처에서 관련 답변과 참고자료를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줄 필요가 있습니다. 국정감사 전날에 질문을 던지는 건, 국민, 국회, 공무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갑자기 국정감사 이야기가 길어졌는데(ㅎㅎ;), 요약하자면 공무원은 97%의 쓸데없는 일과, 3%의 의미 있는 일을 합니다. 보람 있는 순간이 너무 적다고요? 업무량만을 기준으로 보자면 3%는 적은 게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느껴지는 보람의 크기와, 그 업무에 부가된 권한을 생각하면 질적으로는 적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통상 중앙부처 사무관에게는 '특정 산업 분야를 총괄'하도록 하는데요. (부처, 그리고 자리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사무관에게는 해당 산업분야를 어떤 방향으로 진흥하거나 규제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이 주어집니다. 물론 사무관의 결정으로 끝나는 건 아닙니다. 과장, 국장, 실장, 차관, 장관 보고를 거쳐야 합니다. 새로 정책을 기획하겠다면 당장 기재부, 국회를 통해 예산을 따내야 합니다. 절차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대로' 방향성을 정해 밀고 나갈 수 있다는 점만은 확실합니다. 저도 5년간의 사무관 생활동안 순전히 제 판단으로 만들었던 정책과, 법안, 협의체들이 있었습니다. 현장의 수요를 듣고, 연구용역을 통해 제 논리를 뒷받침할 자료를 마련하고, 보고서를 통해 과장님, 국장님을 차례로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마치 접시 위에 날계란을 올린 채 달리는 기분이랄까요? 정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조금만 삐끗해도 예산이 반영되지 않거나, 어그러지기 일쑤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처럼 지난한 절차를 견뎌내면 '내가 맡은 분야'에서 만큼은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게 되는 것이죠. 각 산업 분야는 자기들만의 작은 '세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사무관의 결정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새로운 세상을 여는 판단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큰 정책 결정권과 영향력을 지니는 직업은 민간 어디에도 없습니다. 특히나 20대 중반~30대 초반에 말이죠. 그럼 전문직 아니냐고요? 씁쓸하게도 전문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순환보직 제도 (저는 개인의 선호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작금의 순환보직 제도가 정부 업무역량 하락의 주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입니다.
특정 자리에 1년 이상 있게 되면 눈이 트이고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 듭니다. 맡은 업무가 손에 잡히는 느낌도 들죠. 이걸 ‘그립감’이라고 표현합니다. 문제는 그립감이 잡힐 때쯤 보직이 바뀐다는 점입니다. 민간 전문가를 만나도, 기재부, 국회를 만나도 당당하게 업무의 내용과 지원 필요성을 설명하고 정책의 5년, 10년 뒤를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르기가 무섭게 생뚱맞은 분야로 인사발령이 납니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될 기미가 보이면 그 분야에서 해고시켜 버리는 그런 구조이죠. 그래서 사무관은 (슬프게도) ‘전문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남들이 가질 수 없는 정책결정 권한을 지닌다는 점에서 일종의 '특수직'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사무관이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나중에 저를 얼마나 원망하겠어요. 다만 과소평가된 부분은 제대로 전하고, 또 과장된 부분은 바로잡아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돕고 싶습니다.
저는 일선 소방서에서 구급대원으로 활동하며 군복무를 마쳤고, 대학교에서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사무관이 되었죠. 공교롭게도 세 직업의 공통점은 '비선호 직업'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누군가 '구급대원 할만한가요?'라고 물으면 위험하고 끔찍한 구급 현장에 출동해야 하는 이 직업을 선뜻 추천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업무 내용이 나빠서 추천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위험하고 고돼서죠. 현장에서 일하는 구급대원분들의 '자기 효능감'과 자존감은 최고 수준입니다. 직접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고, 감사인사를 들으면 그보다 보람찰 수는 없습니다.
사회복지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전국각지의 복지관에 종사하고 계신 사회복지사 분들은 높은 급여를 받는 것도 아니고, 고된 업무에 시달립니다. 그럼에도 지역 주민을, 혹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돕고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끼고 사명감을 갖습니다.
그럼 위 두 직업은 '좋은 직업'일까요? 여기서부터는 '좋은'의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급여 수준이나 복지'를 담은 의미라면 좋다고 말하긴 어렵겠습니다. (구급대원은 야간 출동에 따른 수당이 붙어 같은 직급의 공무원보다는 급여가 많기는 합니다) 가성비(?)가 좋은 직업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좋은'의 의미를 '자기 효능감(또는 동기부여)'의 측면에서 찾는다면 좋은 직업임이 확실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기부여' 되지 않는 일을 꺼립니다. 지극히 반복적인 업무나,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에 비해 티가 나지 않는 일들이 그러합니다. '내가 아닌 어느 누구든 할 수 있는 일', 또는 ‘아무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예를 들어 정수기 옆에서 물컵에 물을 받아주는 일을 한다고 칩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물을 직접 받아갈 수 있는데 이런 업무를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요?)을 하게 되었을 때 의욕은 줄고 자기 효능감도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팽팽 놀면서 돈 벌 수 있는 직업이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오랜 기간 반복하게 되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나아가 '나는 왜 살지?'라고 느끼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다수입니다. 세종에서는 일이 없는 부처에 있는 공무원이 격무에 시달리는 공무원과 1:1 트레이드(서로 부처를 맞바꾸는 일)를 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다들 "미쳤어?!"라고 말하지만, 일이 없는 부처에 있었던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입장이 이해됩니다. '이렇게 살려고 태어났나 싶어서'라고 말하거든요. (다른 부처에서 써준 보고서를 묶어 재포장한 다음 윗선에 보고하는 ‘호치키스 사무관’들이 이런 고충을 흔히 토로합니다. 본인의 소관분야도 없고, 호치키스 찍는 게 일이라니 얼마나 무의미하게 느껴지겠어요)
정리하자면 사무관(을 비롯한 공무원)은 좋은 직장에 다니는 건 아닙니다. 동일한 노력을 투입한 사기업/전문직 친구들에 비해 보수가 형편없고, 주무관(6~9급)의 경우에는 보수 수준이 훨씬 더 낮거든요.
복지제도는 괜찮지 않냐고요? 우선 육아휴직은 확실히 좋습니다. 자녀 1명당 3년을 쉴 수 있고, 이마저도 몇 차례에 걸쳐 나누어 사용할 수 있거든요. (저출산 시대에 얼른 민간으로 확대 도입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공무원 연금은 개혁된 이후로 '환수율(투입 대비 돌려받는 금액의 비율)' 측면에서 국민연금보다 나빠졌고, 이마저도 추가 개혁이 언제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얼마 전 국회에서 사업설명을 하는데, 수석전문위원이 저에게 사업 잘못되면 공무원 연금을 받지 말라길래 아주 심드렁하게 “어차피 연금 받을 생각 해본 적도 없습니다”라고 맞받아쳤습니다. 하하) 이에 더해 경직적인 조직문화, 주거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세종시로 이주해야 하는 현실, 사실상 없는 성과급 등을 두루 고려하면 나쁜 직장(악덕 업주.. 어디에 신고하죠?)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합니다. 투입하는 시간만으로는 3% 내외(제가 주관적으로 판단한 비중입니다)이지만, 동년배 어느 누구도 갖기 어려운 결정권을 갖게 되고, 불과 1년만 있어도 소관 분야의 최고 전문가(지식의 깊이가 아니라, 해당 산업분야의 동향, 방향성 측면에서 말이죠. 방향성을 스스로 정하기 때문입니다) 중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괜히 포럼이 열리면 해당 분야 담당 사무관을 연사로 초빙하는 게 아닙니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정책의 향방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거든요. 아무리 식견이 뛰어난 교수도 사무관만큼 정책의 방향성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 잠깐. 다시 한번 ‘좋은 직장’이 아님은 확실히 하겠습니다. 일이 좋을 뿐 회사가 좋은 건 아닙니다. (나중에 왜 말 안 해줬냐고 하시면 안 됩니다)
이런 말들을 윗분들은 이해를 못 합니다. 일에 대한 애정 하나로 가까스로 버티는 젊은 사무관들을, 회사가 좋아 남아있는 윗분들이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연금개혁은 소급적용되지 않으니 노후 걱정도 없고, 세종시 특공으로 아파트를 분양받아 돈도 수억씩 벌었고 심지어 김영란 법조차 없던.. 읍읍)
최근 그만두는 사무관이 많은 이유는 일에 대한 애정보다 조직 내 불통, 불합리한 인사제도, 낮은 급여 등으로 인해 회사에 대한 증오심(또는 배신감)이 커져서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제 주변에도 일을 사랑했지만 조직을 사랑할 수 없어 떠나간 동기들이 많거든요.
저는 여전히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당장 내년에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도 답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사무관 또한 앞으로 살아가며 제가 맡을 수많은 역할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하는 지금조차도 저는 공무원이자, 작가이자, (부끄럽지만) 유튜버이자, 운동을 직업인 양 즐기는 30대 청년으로 살고 있거든요.
앞으로 제가 나아갈 방향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제가 왜 20대 초반에 로스쿨 진학이나 대기업 취직이 아닌 행정고시를 치르기로 마음먹었는지(만 22살이 되던 겨울에 행정고시에 진입했고 만 26살에 합격했습니다)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책결정이라는 특수한 업무를 수행하는, 다른 직업에서는 결코 갖기 어려운 자기 효능감과 동기부여 요소를 지닌 장점을 보고 행정고시에 진입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97%의 무의미한 업무가 주는 고통에 미쳐버릴 것 같다가도, 가끔 찾아오는 보람에 취하기도 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무관이라는 직업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에게 진입을 권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직업이 무궁무진합니다. 저도 스타트업에서도 일해보고 싶고, 법조인도 해보고 싶고, 심지어 한의사, 디자이너, 의류 편집샵 사장, 강사, 개발자도 해보고 싶습니다. 세상은 넓으니 자신의 미래를 좁은 길로 한정하지 마시고 부디 시야를 넓히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이미 행정고시에 진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면 제 글을 통해 어떤 장점과 애로사항이 있는지, 본인이 그린 사무관의 이미지가 실제와 얼마나 부합하는지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족을 덧붙이자면, 위 글은 회사에서 느낀 답답함과 분노를 필터링한 일종의 제로콜라 같은 글임을 밝힙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 혹시 군데군데서 느껴지더라도 흐린 눈 아시죠?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