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기 싫지만 시리즈 1편
인류 역사상 '강제 이주'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힘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일이라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을 뿐. 우리나라 역사만 훑어봐도 수많은 사례가 존재한다. 가깝게는 일제강점기에 사할린 강제 이주, 멀리는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유민의 당나라 강제 이주 등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강제 이주는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반강제 이주'에 가깝지만)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세종시로의 강제 이주다.
다른 진로를 찾거나 이직할 기회도 있었고, 무엇보다 정부청사가 세종으로 이전한 이후에 시험에 진입했기 때문에 강제 이주당했다고 하소연하기엔 광화문에서 일하다가 세종시로 끌려온 선배들 보다는 처지가 낫다. 아니, 생각해 보니 전혀 낫지 않다. '(세종시로 가야 함을) 알고 내려온 사람'이라는 이유로 세종시 이전 공무원이면 누구나 받았던 아파트 특별공급(부동산 가격이 많이 오르면서 수억 원의 수익을 낸 사람이 부지기수다)도 받지 못했다. 내가 세종시에 들어오기 1년 전까지 특별공급 제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처음 세종에 내려왔을 때는 정말 나를 제외한 직장 사람들 모두가 집을 한 채씩 갖고 있었다. 부동산 폭등기(2021년~2022년)에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싱글벙글했다.
나는 평생을 수도권에서 살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 곳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대학 때 다시 고향인 서울로 돌아왔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 지금 살고 있는) 동네는 H대 입구 근처로 여러 인디밴드 가수들의 노래 제목이나 가사에 등장하는 동네다. 항상 생기 넘치고 변화가 빨라서, 세종과 공통점이라고는 '한국어'를 쓴다는 점 밖에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다.
붙여만 주시면 어디든 삼보일배,
아니 일보삼배 하면서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지 말걸 그랬다. 고시생들은 합격 후 닥쳐올 시련을 매우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도래하지 않을 것 같은 끝을 향해 달리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당장 벗어나고 싶으니 뭐라도 괜찮다는 마음이 드는 것일 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합격하면 세종시로 이주해야 할 확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로를 바꾸지 않았다. 국가와 사회를 위한다는 대의 앞에서 나의 거주지쯤이야 중요치 않았다. 그리곤 고시에 덜컥! 합격해 버리고야(?) 말았다.
합격 후에도 세종시로의 강제 이주를 피할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서울에 있는 부처를 지망하면 될 일이었다. 뭐, 지망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3지망으로 쓴 게 문제였을 뿐. 그 부처 업무 분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서울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썼고, 실은 합격했어도 언젠가 가고 싶은 부처와 트레이드를 할 요량으로 지원한 것이었다. 면접을 잘 본 덕일까? 세종시에 소재한 1지망 부처에 덜컥 합격해 버렸다. 끝이 도래하지 않을 것 같은 세종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적응? 거의 적응이 불가능한 척박한 환경이었다. 회사-집 오직 그뿐인 회색도시였다. 마음 편히 밖에서 식사하거나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세종에서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장소는 오직 두 곳, 바로 '내 집'과 '내 차' 뿐이었다. (조지 오웰의 1984를 패러디해 세종시 배경의 2024를 쓰면 딱이겠다 싶다) 회사 사람들이 도시 곳곳에 포진해 있고,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도 너무 많아서 어디서 무슨 얘기를 하기가 두려웠다. 동네 식당에서 내 지인, 친구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회사 사람을 마주쳐 인사한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회사에서 주는 업무량도 많으니, 멈추지 않는 쳇바퀴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밤늦게까지 야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밀린 집안일을 해결하고 잠들기 바빴다. 그 시기 내 영혼의 도피처는 바로 이곳, '브런치'였다. 퇴근 후 짬짬이 글을 쓰며 회사와 집 사이에 남은 수많은 밤을 채워나갔다.
주말엔 서울에 올라가기 바빴다. (지금도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서울로 득달같이 올라간다. 똥종 ㅃㅇ)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참았던 숨을 서울에 와서야 내뱉는 기분이었다. 뭍에 나온 물고기가 펄떡거리듯, 나는 그렇게 세종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어릴 땐 시간이 그렇게도 흐르지 않더니 이제는 세월이 흐르는 게 무서워지는 나이가 되었다. 사무실에 앉아만 있으니 거북목에, 어깨는 굽고, 허리는 아파왔다. 점심시간, 저녁시간을 활용해 회사 헬스장에 드나들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입에 음식을 밀어 넣듯 운동을 했다.
이렇게 세월을 흘려보내다 보니 문득 '내가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은 얼마나 되나?' 싶었다. 분명 내 삶인데, 회사를 위해 대부분의 삶을 쓰고 있었다. 회사가 내 삶을 앗아간다(삶을 앗아간다는 건 나를 서서히 죽인다는 의미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글 쓰며, 책쓰며 나 자신을 지켰던 것처럼 '내 몸을 위해 시간을 써 나를 지키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몸부림치는 김에 말 그대로 '몸부림', 운동을 제대로 해보기로 했다.
몇 년간 배우고 싶었음에도 레슨비가 비싸서, 시간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미뤄왔던 테니스 레슨을 등록했다. 주 2회 1:1 레슨에 월 24만 원, 분명 부담스러운 액수다. (회당 레슨은 겨우 20분이니 분명 비싸다) 그러나 더 미루다간 영원히 배우지 못할 것 같아서 (테니스 레슨 시세가 시가도 아니고 갑자기 저렴해질 리가 없으니) '이제는 나에게도 좀 투자하자'는 생각으로 과감히 시작했다.
배운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아직 랠리도 제대로 못하는 허접한 실력이지만 세종에 머무는 한 계속 배울 예정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세종에는 테니스 코트가 많아서 서울보다 여건이 낫다. 대강 살펴봐도 호수공원 옆 중앙공원에 10개의 테니스 코트가 있고, 시내 한복판에도 18개의 정부청사 테니스코트가 있다. 의지만 있으면 즐길 공간은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테니스만 하는 게 아니다. 매주 월요일에는 회사 동료들과 러닝도 하고 있다. 다른 스포츠에 비해 돈이 들지 않아 불경기에 유행한다는 러닝(누군가 '거지운동'이라더라)은 생각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헬스장에서 뛰는 러닝머신은 그렇게 재미없었는데, 5km 거리를 정해두고 기록을 단축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타깝게도 갑자기 날이 쌀쌀해지고 회사에서 업무를 끝없이 던져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바람에 요 몇 주는 뛰지 못했다.
테니스, 러닝에 더해, 크로스핏도 하고 있다. 피지컬 100에서 크로스피터들의 체력을 보고 감탄하면서 언젠가 해보자 싶었는데, 명절 할인기간에 충동적으로 3개월권을 끊었다. 시간이 더 흐르면 도저히 운동강도를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아, 더 늦기(늙기) 전에 시작하자는 생각이었다. 헬스장에서 꾸준히 길러온 체력이 있으니 따라는 가겠거니 했는데, 웬걸. 내가 최약체다. 운동 자세도 방식도 너무 낯설어서 갈 때마다 불가촉천민처럼 위축된 채 겸손히 배우고 있다. 호흡이 가빠 곧 죽을 것 같지만, 다치지 말고 버티자는 마음으로 운동 중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세종은 서울에 비해 운동하기 좋은 동네다. 호수공원을 비롯해 집 근처에 달릴 수 있는 천변도 많고, 공원에는 테니스장, 축구장, 야구장, 농구장 등이 잘 갖춰져 있다. 재작년 8월 개관한 정부세종청사체육관에서는 수영부터 갖가지 운동을 원하는 만큼 배울 수 있다.
운동을 배울 수 있는 학원도 점점 늘고 있다. 크로스핏장도 몇 년 전에는 세종 시내에 1~2개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집 바로 앞에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늘었다. 나도 단지 앞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갈 수 있는 가까운 크로스핏 장에 다니고 있다. 운동 끝나고 집까지 뛰어와(기어와) 씻으면 그만이라 무척 편리하다. 서울이었다면 도보 10분~15분은 기본이었을 텐데 말이다.
헬스장도 이용하기 나쁘지 않다. 정부청사 곳곳에 있는 헬스장 설비는 약수터 수준으로 낙후돼 있으나, 최근 중앙동이 지어지면서 최신 장비로 무장한 헬스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운동 기구를 충실히 넣어준 것을 보니, 죽지 말고 (죽기 직전까지) 일하라는 뜻이리라. 청사 헬스장 이용료는 무료이고, 옷과 수건을 빌리고 싶으면 회당 천 원을 내면 된다.
그렇지만, 단지 운동설비나 공간이 잘 갖춰졌다는 이유만으로 서울보다 운동에 적합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금 더 비쌀지언정) 서울엔 더 넓고 고급스러운 설비를 갖춘 공간이 많다. 세종 호수공원이나 천변에서 달리기 좋다고 말했지만, 웃긴 소리다. 서울에는 한강이 있다. 한강 러닝을 감히 똥종 따위가 어떻게 이기리? (호수공원-한강 비교 자체가 수치다)
세종이 서울보다 운동하기 좋은 숨은 이유가 있다. 바로 '짧은 통근 시간'이다. 서울에서는 도어투도어(Door to door)로 집에서 회사까지 편도 1시간이면 통근 시간이 짧은 축에 속한다. 러시아워(Rush hour)라는 표현에 걸맞게 출퇴근 시간 내내 인파 사이에 꽉 껴야 한다. 출근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정신 나간 월세를 부담하면서 회사 근처에 원룸을 구해야 한다. 이 경우 시간은 생기지만 돈이 살살 녹는 문제가 있다.
세종의 집-회사 도어투도어 시간은 출근할 때 15분, 야근 후 귀가할 때 7분이다. 물론, 청사와 먼 곳에 거주하면 출근 시간이 30분 이상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서울처럼 1시간 이상을 빼앗기는 경우는 없다. 대전에서 세종까지 통근 시간도 40분~5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안 막히면 세종에서 대전 성심당까지 30분 컷이다)
짧은 통근 시간으로부터 절약한 시간을 잘 활용하면 운동하기에 좋다. 딱히 러시아워가 없으니, 퇴근 후에도 체력이 남을 수 있다. (야근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세종에서 젊은 공무원들이 운동에 열중하는 이유는, 운동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다. 정확한 분석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접근성 좋은 운동 시설과 짧은 통근 시간 등 숨은 이점도 한 몫하고 있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세종에 5년 살아 보니 이곳이 서울보다 운동하기 좋은 동네임은 확실하다.
’세종은 도시가 아니다. 도시인 척하는 유사도시다.’라고 어느 저명한 학자가 말했다. 아니, 사실 내가 했던 말이다.
앞으로 비정기적으로 세종시와 관련된 ‘인정하기 싫지만’ 시리즈를 쓸 예정이다. 슬프지만 적응해갈 수밖에 없는 강제 이주민의 현실일 수도 있고, 자존심 상하지만 세종을 하나의 도시로 인정해 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물론, 어떤 내용을 쓰든 세종시를 마냥 예찬하는 글은 아닐 거다. (난 올라야 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인정하기 싫다 해도 세종시가 완벽하게 잘못 설계된 도시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