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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꼭대기층에서 일하는 자의 슬픔

인정하기 싫지만 5편

by 할때하자


어릴 적부터 줄곧 로망이었다. 층고 높은 화려한 로비를 지나, 대리석 바닥을 또각또각 걸어 뷰가 훤한 고층 사무실에 출근해 시내를 내려다보며 일하는 멋진 나.

디테일이 부족했던 탓일까. 30대의 나는 로망을 억울하게 구현했다. 건물 꼭대기층까지 뚫린 드높은 로비를 지나, 대리석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바닥을 걸어 건물 꼭대기 층으로 출근하고 있다. 문제는 꼭대기층이 겨우 4층이라는 점이지만.


여의도 한복판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간혹 퇴근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국회의사당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야경을 SNS에 자랑(?)한다.


무심코 여의도에서 일하는 친구 회사에 놀러갔다가 한참을 울었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지만 다들 부러워할까 봐 SNS 업로드는 참고 있다. 굽이치는 청사 건물이 시야에 가득한 그런 뷰, 어쩌면 한강뷰보다 더 (희)귀하다. 물론 내 자리엔 창문이 없기 때문에 뷰를 보려면 큰맘 먹고 복도까지 나와야 한다.


여의도에 비해 살짝 감옥같긴 하다


그나마 꼭대기층에 있으니 뭐라도 내려다 보지, 만일 2층에서 일했더라면 창 앞에 주차된 차량의 뒤꽁무니만 실컷 바라보며 일했을 거다. 이 동네에서는 나름 상류층(?)이니 푸념할 입장이 아니다.


세종 정부청사는 칸막이 없는 행정을 위한답시고 와룡의 형상으로 길게 지어졌다. 억지로 구름다리로 이어둔 덕분에 1동부터 15동까지가 모두 한 건물이다. 마음먹으면 1동 국무조정실에서 15동 문화체육관광부까지 한 시간 남짓이면 걸어갈 수 있다. 물론 그렇게 걷는 사람은 없다. 건물 밖으로 걸으면 20분이면 가기 때문에.

이렇듯 건물을 길게 늘여뺀 덕분에 4층~7층 정도의 건물로도 중앙부처 공무원 대다수를 수용할 수 있었다. 고층빌딩을 눕힌 셈이다.


구름다리는 주로 점심시간 복도산책용으로 쓰인다

대관절 하늘에서 바라봤을 때 용의 형상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우정사업본부-국가보훈부, 법제처-환경부가 구름다리로 이어진다고 어떤 협업이 활발해지는 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지어두니 분명 확실한 효과가 있다.


첫째로 많은 사람이 사이좋게 꼭대기층에서 일할 수 있다. 드높은 빌딩이었다면 아주 극소수만이 꼭대기층을 점유했을 테고 소위 펜트하우스라고 부르며 거드름을 피웠을 테지만, 세종청사는 가래떡처럼 길게 펼쳐놨으니 다수가 꼭대기 층에서 근무할 수 있다.


둘째로 더 큰 효과가 있다. 이열치열이라고 아시는지. 복날 삼계탕을 먹는 조상님의 지혜로, 참고로 난 아직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세종청사는 조상님들의 지혜를 받들어 이열치열을 건물로써 구현했다. 꼭대기층에서 일하면 빛의 속도로 도달하는 태양 복사열을 온몸으로 받을 수 있는데, 여름철 냉방온도 28도로 제한된 청사는 오후가 되기도 전에 건식 사우나처럼 뜨끈해진다. 오후 6시 이후엔 냉방마저 끊기니, 야근이라도 하는 날엔 레스팅하며 익힌 스테이크처럼 겉과 속이 알맞게 익는다. 복날을 따로 챙길 필요가 없다. 매일이 이열치열의 연속이다.

냉방이 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더워 죽겠는데, 주기적으로 열받는 안내방송까지 나온다.


현재 냉방 중이오니, 에너지 절약을 위해
열려있는 창문과 출입문을
모두 닫아주시기 바랍니다.



꼭대기층에서 출입문과 창문까지 모두 닫으면 정말 견디기 어렵다. 선풍기를 틀어도 드라이어처럼 뜨끈한 바람만 나오니 땀이 식을 새가 없다. 시원하게 냉방해 줄 자신이 없었다면 건물이라도 열효율적으로 지었어야 하는데, 대체 그놈의 협업행정을 건축물로 구현하겠다는 생각은 어떤 놈이 한 건지. 냉방온도는 여전히 제한해 둔 주제에 건물까지 아주 열받기(?) 좋게 지어두었다.


대신 겨울에 따뜻하지 않냐는 질문이 있을 수도 있겠다. 맞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꼭대기층은 겨울에 확실히 따뜻하다. 대신 저층이 문제다. 세종청사는 죄다 필로티 형식으로 지은 바람에, 1층은 거의 기둥이고 2층부터 사무실이 들어앉은 곳이 많다. (지진이라도 나면 도미노처럼 우르르 무너지기 딱 좋다)

눈 내린 날 고가도로나 교각 위 눈은 잘 녹지 않는 걸 운전자들이라면 알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구조물의 경우 아래위로 공기가 통해 온도가 내려가기 때문이다. 필로티 형식의 건축물도 예외는 아니다. 세종청사 맨 아래층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공중정원(?)처럼 아래가 뻥 뚫린 사무실에서 일하기 때문에 겨울에 엄청난 추위를 경험할 수 있다. 하하. 냉방 제한만 있는 줄 알았지? 청사에는 난방 제한도 있다.

겨울철 2층 사무실에서 일하며 겪은 웃픈 일화가 있다. 사무실이 얼마나 추웠냐면..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어두지 않으면 타자를 치기 곤란할 정도였다. 손이 얼어 일할 수가 없으니 참다 참다 반장갑을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맞다. 지우가 끼는 그 장갑이다.


그렇게 반장갑을 끼고 근무하던 어느 날, 과 회의가 있어 열명 남짓의 과원이 한 자리에 모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누가 보면 공동구매했다고 오해할 만큼 모든 직원이 같은 디자인의 반장갑을 끼고 있었다. 이럴 거면 배송비라도 아끼게 같이 구매할 걸 그랬다며 다 같이 빵 터졌던 (몇몇의 눈엔 눈물이 비쳤던 것 같기도..) 기억이 있다.

회사를 벗어나면 쓸 일도 없을 아이템에 많은 돈을 쓰고 싶진 않았을 터. 다들 인터넷 최저가 제품을 구매하다 보니 벌어진 해프닝이 아닐까.


어차피 창 밖은 볼품없는 풍경뿐이고 창 밖을 내다볼 여유도 없는데, 친환경 기조에 맞추어 건물 전체를 태양광 발전 패널로 덮어버리는 건 어떨까. 냉난방온도를 조금 개선해 준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반짝거리는 모습이 하늘에서 봐도 더 멋질 것 같은데.





인정하기 싫지만, 어린 시절 내 로망은 이루어졌다. 드높은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꼭대기층으로 향해 시내 비슷한 것을 내려다보며 땀 흘려 일하는 기분. 이곳은 행복(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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