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업(業)'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

당신은 보람 있게 일하고 있습니까

by 할때하자


꽃샘추위가 이어지고 있다. 삼한사온이라는 선조들의 말엔 틀린 게 하나 없다. 패딩을 입은 날은 유독 햇살이 따뜻하고 봄옷의 먼지를 털면 다시 추위가 찾아온다. 이번 주말엔 강원도 고성에 다녀왔는데 봄맞이를 하려던 계획과 달리 겨울 고별여행을 하고 왔다. 생각지도 않았던 설산과 겨울 바다를 원 없이 눈에 담고 올 수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실속이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으나 회사 경력은 뒷걸음질 치지 않고 계속해서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마치 돌려받지 못할 걸 알면서 쌓는 마일리지처럼.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고참 사무관이 되어버렸다. 참내.


최근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다가, 왜 사무관들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힘들어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느 직장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고시 사무관들은 유독 힘들어하는 이가 많다. 겉보기엔 절대적인 업무량이 때문으로 보이겠으나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면 본인이 투입했던 노력 대비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아서인듯 하다. 월급도 월급인데, 요즘은 '업(業)'에 대한 불만이 더 커 보인다. 이 고민을 함께 나누다가 문득, 좋은 '업'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1. 껍데기는 직에서 오지만 실속은 업에서 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직업(職業)'은 '직분 직(職)'과 '일 업(業)'이라는 한자로 구성된 합성어다. ''은 '사회나 회사 안에서의 위치나 역할'을 뜻한다. 자격(공무원, 의사, 변호사)과 직위(사무관, 과장, 장관) 모두 '직'에 해당한다. 한편 ''은 '생계를 유지하거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몸과 머리를 써서 하는 구체적 행위'를 의미한다. 공무원으로서 문서작성을 주로 하는지, 환자를 진료하는지, 학생을 가르치는지 등 나의 구체적인 행위가 업이다.

직은 이직, 승진 등으로 바뀔 수 있으나 이직을 하더라도 업은 바뀌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직이 동일하더라도 업이 달라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숙련도가 쌓인다는 점이 '업'의 특징이고 책임이 커진다는 것이 '직'의 특징이다. 우린 '직'을 얻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업'에서 만족과 보람을 느낀다. 껍데기는 직에서 오지만, 실속은 업에서 온다. 과연 하루하루 만족하며 살기 위해선 어떤 '업'을 지녀야 할까?


2. 시작과 끝이 있는가? (자기효능감)


업에서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는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출퇴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신상품을 출시하든, 수업을 마치든, 소송을 종결시키든,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시작'과 '끝'이 뚜렷해야 한다. 그래야 시작할 때 각오를 다지고 끝낸 뒤에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자기효능감'과도 밀접하게 연결되는 이야기인데, 일에 시작과 끝이 없다면 자기효능감도 느끼기가 어렵다. 자기효능감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이다. 즉 '난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이자 '내가 해냈어!'라는 보람을 함축한다. 어려운 과제여야 효능감이 커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작은 것에서부터 자주 효능감을 느끼는 게 더 중요하다. 큰 바위를 한 번 밀어내는 것보다,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셔틀콕을 100번 쳐내는 게 효능감에는 더 좋을 수 있다. 효능감을 느낄수록 업에 숙달됨을 느끼고, 여기서 만족과 자신감이 비롯된다.

반대로 시작과 끝이 없으면 효능감을 갖기도 어렵다. 끝이 없다는 건 곧 '성취'가 없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괜히 힘든 게 아니다. 밑 빠진 독이 있고, 그 옆에는 그 열 배 크기의 정상적인 독이 있다고 해보자. 열 배 크기의 독에 물을 1,000번 부어 채우는 일이, 밑 빠진 독에 100번 물을 붓는 일보다 덜 힘들다. 전자는 성취감과 효능감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다 보면 체력보다 정신력이 먼저 고갈되어 버린다.

잠시 중앙부처 이야기를 해보자. 공직사회에서 힘든 업무를 하는 부처들을 부르는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고교보'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고용부, 교육부, 복지부를 일컫는 말이다. 세 부처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와 맞서는 곳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고용부는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맞서고, 교육부는 '입시' 문제와 싸우며, 복지부는 '빈곤'과 싸운다.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만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효능감을 느끼기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단순 반복 업무라고 시작과 끝이 없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요리사들이 매일 똑같은 요리를 만들면서도 효능감을 느낄 수 건 손님이 '맛있다'라고 말하는 한 마디 때문이며, 요리를 팔아 매상을 올리며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력을 쌓다 보면 더 다양한 요리를 더 맛있게 하는 재주를 갖게 된다. 업의 숙련도가 올라가는 것이다. 돈이 벌리는 건 두말할 것도 없고.

3. 언제 쉴 수 있는가? (일의 예측가능성)


우리는 일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물론 일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지만 일만 해서는 행복할 수 없다. 자기 사업을 하면 마냥 즐겁게 일할 수 있지 않겠냐고? 힘든 줄 모르고 일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지치지 않는 건 아니다. 적절한 휴식이 없다면 언젠가는 번아웃이 오기 마련이다. 즉 좋은 업이 되려면 일과 휴식의 경계가 확실하거나 휴식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업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퇴근한 이후 회사와 확실하게 단절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퇴근 후에도 일 생각을 계속해야 한다거나, 생각을 넘어 회사와 소통이 저녁과 주말까지 계속 이어진다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워라밸의 붕괴다. 이렇게 되면 업에서도 힘을 낼 수 없다. 에너지가 충전돼 있어야 힘을 쓸 텐데, 한 번도 충전한 적이 없으니 일할 때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항상 가쁜 호흡을 내쉬며 터덜터덜 뛰는 모양새가 되어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잠을 재운 적도 없으면서 또렷한 정신을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좋은 업이 되려면 업무량이 많지 않은 게 좋다. 우선 퇴근을 해야 내 삶이 있으니까. 근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내가 언제 쉴 수 있는지 예측이 돼야 한다. 막연하게라도 언젠가 안 바쁜 시기가 온다는 경험칙이 존재해야 한다. 평일 퇴근 후에는 확실히 쉴 수 있다든지, 주말에는 확실히 쉴 수 있다든지, 그마저도 아니면 업무가 많은 시기(시즌)와 적은 시기(비시즌)가 구분되어야 한다.

사람은 휴식을 기대하며(기다리며) 마음을 다잡고 일에 몰두한다. 내 업의 비시즌이 언제인지 알고 있다면 시즌에 일이 몰아쳐도 버틸 수 있다. 매일 밤 11시에 퇴근하더라도 다음 달에는 야근도 없을 예정이고 며칠간 해외여행도 다녀올 수 있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기한이 정해진 고생은 생각보다 할만하다. 미래의 휴식을 위해 지금의 휴식을 저축하는 셈이니.

그런 점에서 학교 선생님은 보수가 많지 않아도 제법 좋은 직이자 업이라 생각한다. 학기 중에 아이들을 케어하느라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지만 방학 때는 재충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해외여행 계획도 일찌감치 세울 수 있다. 다음 학기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기 위해 비수기에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4. 성과에 따른 보상이 있는가? (동기부여)


워렌 버핏의 50년 지기이자 버크셔 해서웨이의 부회장 찰리 멍거는 "Show me the incentive and I'll show you the outcome"라는 말을 남겼다. 동물은 보상에 반응하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인센티브는 인간을 열심히 움직이게 하는 동력원이다.

좋은 업이려면 보상이 확실해야 한다. 대표적인 예는 변호사가 있다. 맡은 소송에서 승소하는 경우 '성공보수'가 뒤따른다. 성과에 따른 금전적 보상이 즉각적으로 주어지니 기쁨은 배가 되고 의욕도 고취될 수밖에 없다. 최근 SK하이닉스의 1억 원대 성과급이 이슈가 되었는데 (너무 액수가 크니 감도 안 온다) 이 같은 확실한 보상은 근로자의 의욕을 북돋는 즉각적이고도 효과적인 처방이다.

반대로 보상이 없다면 열심히 일할 유인이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 보상이 공정하지 못해도 마찬가지다. 노력에 따른 보상도 없는데 대체 왜 열심히 해야 하는가? 월급 받았으니 하라고? 웃기는 소리다.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위선자임이 분명하다. 인간은 간사하기에 월급은 오래 못 가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이자 나의 권리가 되어 버린다. 그러니 역설적이지만 누구나 이미 월급만큼은 일하고 있다. (월급만큼만 일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대신 기대 이상의 결과물이 나올 리는 없다. 인센티브가 없는데 역량의 120%를 뽑아내는 호구는 흔치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공무원 중엔 호구가 많다) 좋은 업이라면 성과에 따른 금전적 또는 비금전적 보상(명예, 인정, 경력 등)이 명확해야 한다. 보상을 기대하며 120%의 퍼포먼스를 발휘하는 과정에서 회사도 성장하고 개인도 성장하는 것이다.


5. 공무원의 '업'은 좋은 업일까?


자기 효능감, 예측가능성, 동기부여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면 단연코 좋은 업이라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업은 셋 중 일부만 갖고 있다. 자기 사업(개업 변호사, 개원 의사도 포함된다)을 하면 자기효능감과 동기부여는 있으나 휴식에 대한 예측가능성은 갖기 어렵고, 교대근무를 하는 경우에는 자기효능감과 예측가능성은 있으나 나에게만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 셋 다 결여된 직업도 있을까? 있다. 놀랍게도 공무원, 그중에서도 중앙부처 사무관 일이 그렇다. 첫째로 공무원은 일의 시작과 끝이 뚜렷하지 않다. 보고서를 줄곧 쓰니 분명 내 업 중에 보고서 쓰는 일이 포함되는 건 알겠는데 이게 내 직업의 본질이 아님에도 끝이 없다. 요리사가 되었는데 몇년째 식당 앞 마당만 쓸고 있는 셈이다. 비슷한 제목의 보고서를 20번 30번.. 자잘한 수정하는 경우를 포함하면 100번도 쓴다. 예를 들어 <A산업 현황 및 대응방안> 같은 보고서다.

사무관의 업무는 정책기획이나 법제 정비 등이 메인이라 장기적인 시계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즉 1~2주 새에 일어나는 변화가 크지 않다. 그런데 하루이틀이 멀다하고 수시로 보고를 요청한다. 보고만 요청하면 다행이지, A산업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윗사람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통에, 이상한 지시를 막느라 힘을 다 뺀다. 상황이 이러하니 보고서를 써도 보람이 없다. 이 보고가 '끝'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둘째로 비수기가 없다. 우선 주중에 퇴근이 늦는 건 당연하고, 퇴근 이후나 주말에도 연락이 수시로 온다. 전혀 예측이 안 된다. 내가 언제 바쁠지 언제 편할지 전혀 알 수 없다. 이러니 나는 입사한 지 만 6년이 지났음에도 제대로 된 여름휴가를 계획해 본 적이 없다. 항상 여름을 다 보내고 8월 말쯤이 되어서야 급하게 하루이틀 휴가를 내고 쉬거나 가까운 나라에 잠시 다녀오는 게 전부였다. 몇 달 전에 비행기 표를 예매하는 일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그때 가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비행기 취소한다고 회사에서 수수료 내줄 것도 아닌데.

셋째로 동기부여 수단이 없다. 성과급은 존재하나 이는 '성과급'이 아니라 '연차에 비례한 수당'에 가깝다. 짬이 찬 만큼 주는 돈이라는 이야기다. 입사 초반 2~3년 간은 성과를 깔아줄 생각을 하는 게 좋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연차가 낮다는 이유로 낮은 성과를 주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회사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고 흑화한다. (고시 사무관은 연차가 낮다고 가벼운 일을 주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연차가 쌓이면 '당연히' 높은 성과를 기대하게 되고, 이 또한 동기부여에는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 당연히 받을 돈이니 당연하지(?). 기대한 만큼의 성과등급을 주지 않으면 분노가 치밀 뿐이다.


공무원에게는 프로젝트 단위의 효능감이 필요하다. 쓸데없는 보고서를 쓸 시간에 명확한 중장기 계획을 세우거나 정책을 기획하고 법을 개정하는 등 성과가 뚜렷한 본질적인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효율을 높여주어야 한다. 소위 '가짜 노동'을 줄이기 위해 조직 전체가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말하면 '가짜노동 줄이기 TF팀'을 꾸리고, 장관 주재로 가짜노동 줄이기 TF팀 회의를 개최하게 되고, 그 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사전회의'까지 준비하는 게 공직사회지만... 아무튼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한다.

둘째로 평일 퇴근 이후와 주말의 휴식을 온전히 보장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나랏일의 특성상 언제나 휴식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예를 들어 전쟁을 근무시간에만 할 수는 없으니). 그러나 긴급한 사안이 아니면 휴식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예산편성/국정감사 시즌이 있듯 비수기도 존재할 필요가 있다. 여름휴가를 확실하게 일주일이라도 보장해 주든지.. 예측가능성이 조금 더 필요하다.

셋째로 보상(동기부여). 최근 모 부처에서 성과가 우수한 직원에게 3000만 원의 성과급을 지급한다고 하여 이슈가 되었고 지금은 전부처 여기저기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너도나도 3000만 원을 지급하겠다며 난리다. 근데 앞서 말했지만 인센티브만큼 중요한 건 인센티브의 공정성이다. 공정성이 결여된 인센티브는 인센티브가 아니다. 로또지. 공직사회에서 다듬어야 하는 건 인센티브의 액수가 아닌 공정성이다. 공정하지 못할 바에야 전 직원 동일하게 나눠주는 편이 백배 낫다. 공정성이 결여된 인센티브는 동기부여는커녕 남은 동기마저 소멸시킬 뿐이다. 늙고 배 나온 아저씨들아. 젊고 유능한 직원들의 사기 좀 그만 꺾자.


6. 당신의 업은 좋은 업인가?

이쯤에서 묻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업은 좋은 업인가? 한 번쯤 고민해 볼 만한 문제다. 아직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지 고민 중이라면 그 업이 위 조건들을 충족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공무원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라면, 이런 좋지 않은 업을 감당할 수 있는지, 그만큼 공직에 헌신할 마음의 준비(라고 말하고 '호구가 될 준비'라고 읽는다)가 되어있는지 묻고 싶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공직에 입직한 이들 대부분이 어깨에 지고 있는 짐이다. 끝없는 의욕 저하 앞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요즘은 공무원을 멸시하는 (대체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대중의 시선과도 싸워야 한다.


나의 업이 좋은 업이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좋은 업'으로 바꾸어가거나 '좋은 업'을 찾아 나서거나. 나는 후자를 택했고 글 쓰는 일을 또 다른 업(부업)으로 삼았다. 본업을 바꿀지에 대한 고민도 계속하고 있다. 내가 숨 쉬는 한 끝나지 않을 고민이다. 당신은 만족스러운 업을 갖고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어떤 업을 하며 살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