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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Jan 12. 2020

더 라이트하우스(El Faro, 2019)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https://www.imdb.com/title/tt7984734/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지 않아 등장하는 특이한 시점 샷이 있다. 토마스(윌렘 데포) 지시로 등대와 주변 기물들을 정비하던 에프라임(로버트 패틴슨) 등대지기의 숙소 지붕을 수리하던 , 뜯겨나간 지붕 틈 사이로 잠든 토마스를 훔쳐보는 장면.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무미건조한 일상이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도 기억 속에서 두드러지는 장면 중 하나인데, 우선 극 중 유일하게 상하관계가 전복되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철저하게 구조화된 상명하복의 관계

두 명의 등장인물은 철저하게 상하관계를 맺고 있다. 선지자와도 같은 말투로 ‘뱃사람의 코드’ 따위를 들먹이며 절대자에 가까운 권위로 에프라임에게 잡일에 가까운 일만을 시키는 토마스는 역설적으로 그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등대의 빛을 독점한다.

그래서, 에프라임을 따라 이동하는 카메라는 절대로 상하 이동을 하지 않는다.

복층 구조인 등대지기의 숙소 내에서도 계단을 오르는 장면은 절대 등장하지 않으며, 등대를 오르는 순간도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에프라임을 수평이동으로 잡아낸다. 카메라는 1) 수평으로 이동하거나, 2) 갈매기와 토마스를 향해 위를 볼뿐이다.

오로지 위에 언급된 그 장면에서만 에프라임은 ‘감히’ 토마스를 내려다보게 되며, 그렇기에 바로 그 잘면이 전복적인 쾌감으로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것.
단순한 권력 갈등이 아닌, BDSM 관계의 갈등

두 번째로 그 장면이 도드라지는 이유는, 몰래 훔쳐본다(관음)는 행위뿐 아니라 에프라임의 시선이 바라보는 토마스의 모습이 묘하게 에로틱하기 때문이다. 전혀 섹슈얼하게 표현되지 않을 것 같던 18-19세기의 일체형 면 잠옷을 입은 토마스는 어이없게도 엉덩이 부분을 드러낸 채 엎드려서, 엉덩이를 추켜올린 채 잠들어 있다.

이러한 시점 때문에, 단순한 권력 갈등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두 인물의 관계는 보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게 된다. 위에서 언급된 절대자로서의 토마스는 에프라임을 소유하고 속박하는 주체가 되고, 그의 지시에 복종하던 에프라임은 급기야 그를 동경하는 동시에 의심하고 증오하는 입장에도 놓이며 종국에는 (다양한 층위에서) 토마스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이 첫 단추로부터 명확하게 목표한 지점으로 올곧게 나아간다
알고 보면, 원형적 신화 서사

찬찬히 살펴보면 영화가 가진 이야기는 상당히 원형적이고 종교적 서사에 가깝다.

죄인이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탈출구를 찾고, 절대자에 귀의하지만 결국 그 절대자(혹은 그 절대적 규율의 집행자)에 대한 의심을 놓지 못하고 도전하다가 벌을 받는 이야기.

영화는 ‘절대자에 대한 도전’을 주제로 한 다양한 신화의 모티브를 아낌없이 차용하는데, 토마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등대의 불빛에 가까이 갔다가 추락하는 에프라임의 모습으로 이카루스를 연상시킨 뒤, 뜬금없이 바닷가에서 갈매기에게 내장을 뜯기는 에프라임의 모습으로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시키는 식이다. 자칫 직접적이어서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흑백 톤과 정방형에 가까운 화면비 속에서 비치는 회화적인 미장센이 그 지나침의 정도를 잡아주는 듯하다.

로버트 패틴슨의 얼굴 근육

해리포터와 불의 잔 때만 해도 이 밋밋한 마스크의 배우가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하이틴 스타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끝난 뒤에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아방가르드한 커리어에 가리어져 지금의 아-트 시네마 배우 커리어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며,

‘하이 라이프’, ‘더 킹’등의 필모그래피로 다시 날개를 펴기 시작하는 걸 보며 ‘방향을 이쪽으로 잡는구나’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차세대 배트맨이 되었다.

‘더 라이트 하우스’는 윌렘 데포보다도 로버트 패틴슨에게, 더 정확히는 클로즈업된 상태에서 움직이는 그의 얼굴 근육에 기대서 나아가는 영화였다.

자신의 죄의식을 덮은 채 무미건조하게 일관하던 얼굴이 계속되는 내적 갈등과 계속되는 의문들, 외로움에 기인한 광기로 일그러지고 쪼개짐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극에 몰입되어 버리는 것.


P.S. 보통 영문 제목을 스페인어로 옮기면 더 장황하거나 이상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영화는 되려 단일 단어 제목이라서 그런지 스페인어 단어가 더 간결하고 어울린다. El F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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