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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Feb 05. 2023

감상하는 영화가 아니라, 체험하고 공감하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애프터썬.

우리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을 선형적 형태로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여행은 A 지정에서 B 지정으로 가는 직선적인 이동이고, 성장은 0에서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머나먼 미래의 어느 나이까지 닿는 언젠가까지의 여정이다. 그렇지만, 길게 직조된 선형적 흐름을 현미경으로 보듯 들여다보면, 마치 KF94 마스크의 필터처럼 사방팔방으로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미세한 실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그 비정형의 직조물에서는 올이 빠져 사라지기도 하고, 다른 옷에서 들러붙은 실오라기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양 차분히 자리 잡고 있지도 하다.

납작하게 보자면 A에서 B로의 이동으로 느껴지는 직선의 여행도, B로 향하기까지 않은 사건 사고들이 있다. 정작 목적지에 도착해서 우리가 둘러보는 수많은 관광지를 생각해 보면, 여행은 절대로 선형적이지 않다.

그리고, 인생.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많은 경험과 기억, 결정과 후회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의 뇌란 얼마나 고도로 작동하는지 반추는 절대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사랑이기에 기억은 사라지고 왜곡되어 주관의 영역에 남기도 한다. 그리고 주관의 영역에 남은 기억은 이윽고 하나의 관념, 감정으로 응축되어 오래도록 남아있다.

2022년에 본 최고의 영화는 역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였다. 단순히 가족 세대 간의 이야기, 이민자의 이야기로도 볼 수 있지만 그동안 주류 매체에서 소외되어 왔던 부드러운 남성상에 대한 재평가 역시 흥미로웠다. 그 무엇보다도 이 모든 주제를 포괄하는 창작자의 순진무구하지만 결연한 긍정적 애정이 이 영화를 두고두고 곱씹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각기 다른 멀티버스를 선형적인 구조를 초월해 병렬시키면서도 하나의 아이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우리 모두 공존할 것이다'를 완성시킨 것이 아롱다웠다.

마치 영화 속 Everything Bagel처럼.

그리고, 2022년 또 다른 걸작으로 평가받은 Aftersun 역시, 하나의 사건이 발단에서 결단까지 이어지는 작품이 아니었다. 마치 11살 소녀가 아빠와 함께 떠난 여름휴가의 기록을 순서대로 보는 것만 같았던 도입부를 지나, 난데없이 삽입되는 침묵 속 레이브 클럽 신을 지나고, 이 영상을 보는 시점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딸을 마주치고 나서야, 관객은 이 영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신기하게도, 햇빛 가득한 화면을 보면서도 관객은 묘한 불안감을 시작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만 같다.

정말로 놀라운 지점은 관객이 진실되게 극 중 주인공과 동화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더욱더 힘들고 복잡한 가운데 감정적으로 지치는 감상이 되고 만다. 영화의 방향성을 깨닫는 순간 이미 러닝타임은 꽤나 지난 상황이고, 그 방향성에 기반해 영화의 주된 주제를 찾으려고 하는 중, 문득 중요한 것은 선을 따라 찾아내는 결론이 아니라, 뒤늦게 직조된 주인공의 기억을 통해 부여잡고자 하는 하나의 감정상태와 주제의식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물론 이 순간 영화는 이미 중후반부를 달리고 있고 관객은 이제 뒤늦게나마 지나간 러닝타임을 복기하며 스크린 속 아빠의 일상적인 모습 사이로 의아했던 순간과 스쳐가듯 넘겼던 단서들을 힘겹게 복기하려 애쓴다. 러닝타임 내내 영화를 이끌어가는 화면 밖 시점의 주인공, 소피처럼.

팬더믹을 거치며, 우리는 영화를 아는 것이 곧 영화를 충분히 이해한 것이라고 믿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OTT를 통해 시리즈물을 배속으로 보고, 유튜브 리뷰 채널에서 영화의 전체적인 정보를 설명해 주는 영상을 보고 작품을 이미 감상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영화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은 단순히 기승전결을 따라 하나의 이야기를 습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시켜 관객들 앞에 펼쳐냈는지에 몰입하고, 그 아이디어를 경험해 공감을 느끼는 데서 재미와 감동이 발생하기도 한다.

평론가와 전문가들이 칭송하는 시네마의 가치란 것도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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