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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Jul 08. 2023

23-J 스페인 총선, 새로운 정치의 시작일까?

Post 15-M의 신호탄과도 같은 Sumar의 시작

정치는 우리 삶의 많은 것을 결정하는 중요한 절차이지만, 미디어의 필터를 한 번 거치고,  제삼자라는 필터를 한 번 더 거치고 나면 의외로 흥미진진하게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적절한 시기에 절묘한 결정을 발표하는 정치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체스판에서 결정적 한 수를 내려놓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느낌과 동시에, 수천만 명의 국민의 삶이 달려 있는 상황에서 굳건히 자신과 소속정당의 이익이 깔린 결정을 보며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PSOE를 비롯한 좌파 정당은 추락하고, 간신히 명줄만 유지하던 Ciudadanos가 결국 사망선고를 받는 한 편 우파 PP와 극우파 Vox의 약진이 드러난 5월 28일의 지방선거(28-M)의 결과를 받아 든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음 날 아침 바로 연말로 예정되어 있었던 총선을 7월로 앞당겨버리는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의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방선거일 다음날 아침에 이어진 발표는 스페인 전역을 충격에 빠트렸는데, 2010년대부터 평생을 정치 도박을 통해 살아남아 총리까지 된 그의 이력을 보면 전혀 놀라운 것도 아니다. 충격적인 발표 이면에는 상당히 전략적인 계산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데, 실제로 PP의 승리에 비해 PSOE의 득표율 하락은 그렇게 크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투표율이 살짝 낮았기 때문이다. 이번 지역선거의 투표율은 63,91%로, 2019년 대비 약 1%가 하락했다. 전통적으로 PSOE가 강세였던 안달루시아의 세비야 등에서 전반적으로 패배했지만 결과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PP의 승리는 PSOE의 하락 탓이라기보다는 Ciudadanos의 궤멸과 Unidas Podemos의 하락세에 힘입어 PP의 득표율이 높아진 탓이 크다(링크). 즉, 지지층이 돌아서서 패배했다기보다는 우파의 표가 PP/Vox로 몰렸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여지가 충분히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6개월을 기다리며 PP의 조기총선 요구를 받아내며 피로감을 누적시키는 것보다는, 좌파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투표율을 높여 분위기 전환을 노리겠다는 수가 보인다.

한 편, 조기 총선이 더욱 절묘하다고 느껴진 이유는 PSOE보다 더 좌측으로 치우쳐 있는 연정 정부의 한 축인 Unidas Podemos(UP)의 정세 변화 탓이었다. 노동부 장관으로 거의 팬에 가까운 굳건한 지지층을 확보한 욜란다 디아즈(Yolanda Díaz)는 12월 총선을 바라보고 Sumar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론칭한 상황이었다. 당초 Izquierdas Unidas(IU) 정당과의 연합체였던 Unidas Podemos는 IU 소속에서 새롭게 생긴 Sumar와의 공존 방식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총선을 7월로 앞당기면 욜란다 디아즈로써는 총선에 대한 Sumar의 입장을 곧바로 열흘 내에 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이 과정에서 Unidas Podemos와의 빠른 협상이 필수적이었다. 연정 정부의 한 축을 흔들어버림으로써 PSOE 쪽으로의 결집을 노리게 된 것. 이 과정에서 비록 Sumar가 이레네 몬테로(Irene Montero) 장관을 패싱 해버리는 사태를 둘러싼 마찰이 있기는 했으나, 욜란다 디아즈는 결국 제시된 시한 내에 Unidas Podemos를 포함해 총 16개 정당의 세력을 규합해 버리고 총선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Sumar는 Post-15M의 시작이 될까?

욜란다 디아즈의 Sumar가 본격적인 시동을 걸기 시작한 때, 그녀가 속했던 Izquierdas Unidas의 대표였던 알베르토 가르손(Alberto Garzón)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2011년 새로운 세대들이 사회적 불합리함을 참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냈던 15M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기에, 그의 은퇴는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고, Sumar를 지지하며 표명한 입장은 더욱 명료하고 감동적이었다.

확신의 공화주의자로서, 항상 저는 공권력의 혁신을 믿어왔습니다. 이 정당에서 우리가 취해온 많은 공화주의적 전통들-프라이머리, 다양한 급진적 민주주의적 절차들-은 혁신을 추진하기 위한 제안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절차들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정치 프로젝트를 위해서도 건강한 움직임입니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는 만큼, 다른 동료들이 자신들의 에너지와 지식을 기여하도록 하기에 완벽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넷 좌파 언론 엘디아리오(eldiario.es)와 진행된 인터뷰에서 다시금 그는 동일한 역할을 계속해서 유지하면 필연적으로 부패의 위험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세대가 힘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2008년의 경제 위기를 우파 정권이 대응한 것보다 2020년의 판데믹을 좌파 연정 정부가 더 잘 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효용보다 국제사회에서 스페인의 존재감 등을 어필하며 국민들로부터 소외되어 버린 지점을 지적했다. 결국 내러티브의 오류로 인해 우파 세력이 그 주도권을 잡게 되어버린 것.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다른 정치가들에 대한 메시지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결국 여러모로 페드로 산체스 총리와는 대비되는 메시지와 입장을 느낄 수 있었고, 차분하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인터뷰였다.

2008년 경제위기로 촉발되어, 다양한 사회적 불합리함을 참지 못하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움직임이었던 15M는 Unidas Podemos와 Ciudadanos라는 정당의 형태로 이어졌다. 전자는 다양한 메시지를 던지며 정부의 일부로 안착하는 데 성공했고, 후자는 단순히 기존 세력에 대한 반작용 그 이상의 주체적인 메시지를 던지지 못한 채 더 급진적인 움직임(Vox)의 등장으로 인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15M는 Sumar를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사회의 변혁을 위한 다양한 메시지들이 2, 3개의 정당(Unidas Podemos, Izquierdas Unidas, Más Madrid)을 통해 디테일한 방향 없이 제시되었다면, 더 다양한 정치 세력의 규합체인 Sumar는 보다 더 조직적이고 세부적인 제안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제 관건은 새로운 플랫폼 내에서 스페인 내의 다양한 목소리가 오롯이 살아남아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안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고, 그 첫 번째 관문인 조기 총선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다가왔다.

약 10년의 기간 동안 스페인 정계의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전에 들어본 적 없는 이름들로 채워지는 Sumar의 구성원들, 알베르토 가르손의 퇴임과 이레네 몬테로의 (사실상의) 쇠락, 그리고 작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은퇴를 보며 한 세대의 끝을 보는 것만 같아 괜스레 마음이 이상해지기도 하고 스페인의 이러한 활기가 부럽기도 하다.

한 편, 다시금 페드로 산체스의 끝없는 정치욕을 보고 있자면 스페인과 한국이 또 그렇게 다른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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