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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Apr 20. 2016

캐롤

레즈비언 로맨스 이야기다. 물론 여성과 여성이 사랑에 빠진다는 것 이외에는 통속적인 로맨스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간다. 두 주인공 사이에 격차가 존재하고, 그 격차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짜릿함과 좌절감이 발생하는 그런.

이 영화가 놀라운 건, 테레즈와 캐롤이 마주하는 첫 장면부터 테레즈가 엄청난 끌림을 느꼈다는 것이 분명히 하고, 서로가 처음으로 오랜 대화를 나누는 순간부터 페로몬이 영화관 전체에 터질 정도로 팽배한데, 두 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그 정도의 텐션을 유지하면서도 관객이 피로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극 중에 등장하는 남성들이 관계와 상황을 모두 자신들의 필터에 맞추어 재해석 하는 와중에 오직 캐롤만이 테레즈를 '테리'가 아닌 테레즈로 부르고, 그 이름이 original하다고 얘기한다.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던 테레즈는 결국 자신만의 판을 짜 나가기 시작하고, 동시에 캐롤 역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조건을 부정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향을 선택하게 되는.

먼 발치에서 아련히 보는 카메라 사이에서도 단연 빛나는 케이트 블란쳇이 압권.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를 보고 나서 '테레즈는 단순히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됐는데 어쩌다 보니 그것이 여성인 캐롤인 것'이라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해서 좀 논란이 된 것 같던데, 이 발언이 얼마나 언피씨한지는 차치하고, 근본적으로 저 양반이 영화 자체를 오독한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테레즈는 극 중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이성애자 남성과도 유의미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심지어 '사랑한다'는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극 중 대화에서도 분명히 '이전에도 몇몇 남자를 만났지만 아무런 진행이 없었'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본인이 주장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정확히 시대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영화에 유색인종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틴 루터 킹은 아직 저 세상에 현신하시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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