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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Apr 20. 2016

영화 스티브잡스 이야기.

잡스의 초상화가 아닌 추상화.

극이 한창 진행되는 중, 워즈니악의 비난에 스티브 잡스는 이야기한다. 너는 악기를 훌륭하게 연주하는 연주자지만, 나는 그 연주자들이 모인 오케스트라를 훌륭하게 다루는 지휘자라고.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서 마이클 패스벤더가 연기한 스티브 잡스 역시 그러한 역할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입지전적이고 독특한 인물을 '설명'하는 것은 패스벤더가 아니다. 그를 정의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대사'들은 대부분 주변인물들의 것이며, 그 중 대다수가 케이트 윈슬렛의 조아나 호프먼의 입을 통해 나온다. 영화 속 그녀의 존재감은 잡스와 비등하며, 때때로는 그를 넘어서기도 한다.


이렇듯, 영화는 잡스의 일대기보다는 잡스의 이미지, 혹은 컨셉을 그려나가는 데 더 집중한다. 그를 위해 총 세 번의 에피소드를 내세우고, 빼곡히 채워넣은 아론 소킨의 활자들을 통해 스티브 잡스를 설명하기 바쁘다. 그 활자들을 토해내며 주변 배우들이 영화를 채색하는 동안 패스벤더의 잡스가 날이 선 채로 영화 전체의 밑그림처럼 존재하는 양상인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에 방점을 찍는 결정적 장면은 첫 에피소드 초반 10분 가량의 장광연설에 종지부를 찍는 패스벤더의 침묵이다. 이 침묵에서 영화를 관통하는 잡스의 이미지가 발생하고, 그 시점으로 다시 회귀하면서 영화의 종지부를 맺는다. 영화 전체의 상징처럼 중심에 위치하는 지휘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셈.


한 가지 흠을 꼽자면, 대니 보일과 아론 소킨의 조합이 그렇게 환상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대니 보일 영화들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느꼈던 것은 크레딧 직전까지 경쾌하게 유지되는 영화 전체의 페이스였다. 물론 영화라기보다는 광고로 느껴질 정도로 세련된 영상들도 보는 즐거움이 있었고.


그런데 여기에 아론 소킨의 넋나갈 듯한 대사들이 더해지니 관객 입장에서는 부담이 되고, 여기에 영화 자체가 잡스의 '이야기'보다는 잡스의 '이미지'에 치중하다 보니 뚝뚝 끊어진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흥미롭기는 했지만, 대니 보일의 최고작이라고 하기엔 약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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