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시 시작하면서.

The story of how did I came up all along

by Pseudonysmo

블로그라는 매체가 예전만큼의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 지는 꽤 되었다. 속칭 '파워블로거'라는 계층은 '파워블로거지'로 전락하거나, '네이버 라인 이모티콘이 보인다면 바로 넘어가야 할 페이지' 정도의 조롱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일하는 동안 여러 홍보매체들을 활용해 보았지만 가장 직접적인 반응이 오는 것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이었고, 블로그는 사실 홍보보다는 기록의 목적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매우 컸다.

브런치를 시작한 것도 그 이유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저런 생각을 적어두기는 했지만, 그것이 왓챠에 있는 코멘트 뭉치 그 이상이 되지는 않았다. 뭔가 더 큰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에서 이러한 생각을 더 연결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면 의미있는 글이 쌓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런데 막상 쓰려고 보니, 쇠 파이프를 파느라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고, 그런 생각들의 뭉치들을 수년간 만들어놓고 나니 그러한 생각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 블로그는 실패한 시도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2017년 2월이 되면서,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사실 그 결심은 2015년 중순부터 내 안에 존재하던 것이었다. 마치 2014년의 어느 시점부터 타투를 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과 같이. 최종 입사 통보를 받았을 때의 나는 분명히 너무나 기뻐했었다. '기뻐서 몸이 떨린다'는 것을 느꼈던 것도 처음이었다. 주변에서 이런 저런 축하 인사들을 받았고, 앞으로 돈을 왕창 벌어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친구들에게 이런 말도 들었다. '너, 그런데 거기 가서 견딜 수 있겠어?'라는.

수출상사라는 업종에서도 가장 선두에 있던 회사, 스페인어와 국제통상을 전공하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써는 너무도 완벽한 알을 선물 받은 셈이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그 완벽했던 알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작은 균열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어짜피 깨어날 알인데, 큰 문제야 없겠거니 생각했던 것이겠지.


그리고 반년만에, 나는 퇴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일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여가생활만 할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말이 나에게 주어지고, 그 사이에 주중에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면 될 거라고. 그런데 그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큰 규모였고, 이틀 안에 해결하기엔 너무나 큰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내게 떨어지는 온갖 불합리한 상황들과 저열하고 무지한 발언들을 견뎌내면서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안전장치를 죄다 풀고 마지막 퇴사 통보를 한 뒤 다 잊고 싶다는 마음에 떠난 제주도에서 지금 있는 회사의 공고를 발견했고, 기적같이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약 세 달이 지났고, 전반적으로 나의 지금 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기대이상이다. 회사를 가는 길이 매일매일 즐거울 수가 있다는 것을 여기 와서야 깨달았다. 예전 회사의 사람들이 그렇게 그 회사의 장점이라고 주장했던 '본인의 프로젝트를 본인의 생각대로 진행할 수 있다'는 경험을 나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느꼈고, 실질적으로 내가 기획한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즉각적인 피드백으로 감동적인 보람을 느낄 수도 있었다. 내가 이야기하는 코멘트들 하나하나가 의사결정권자에게 올바르게 이해되었고, 나의 의견은 묵살되어 다른 의견으로 뒤덮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효율적인 의견으로 보완되었다. 업무에 큰 영향이 없는 한 나의 개인적인 생활은 보장되었고 심지어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고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마저 주어졌다.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곳에서 살며 일하고 있지만, 웬만하면 이 곳에 게속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블로그지만,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