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휴가는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직장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첫 해로 돌아가게 된 것이고, 그렇다면 휴가를 쓰게 되더라도 눈치가 약간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업무를 하고 보고를 하던 중 '이렇게 일이 진행되면 8월에 휴가 가면 되겠네? 날짜 정해서 알려줘'라는 말을 듣고 나서 상당히 기뻤다. 그러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올린 목적지는 베를린이었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베를린 하면 떠오르는 그 잿빛을 항상 걸어 다니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좋을 것 같은 그런 도시.
베를린 티켓을 사고,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캐리어를 들고 가야 하는가?'였는데, 일단 고려한 사실들: 1) 일단 짧게 혼자 하는 여행이기 때문에 옷에 대한 부담이 없음. 2) 위탁 수화물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먼저 나가는 것에서 느끼는 묘한 쾌감(?)도 있음. 3) 무엇보다 캐리어를 추가로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귀찮은 일임.
새벽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새벽 비행기로 베를린 in, 밤 비행기로 out이었는데 마침 8월 중 MyTaxi라는 콜택시 앱이 공항 왕복 택시비를 15유로로 해주는 프로모션(원래 마드릿 공항까지의 택시비는 일괄 30유로)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흘 동안 베를린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점은, 유럽 도시 치고는 꽤 크다는 인상이었다. 보통은 그냥 걸어 다녀야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여행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베를린은 도저히 그럴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주로 많이 탔던 것은 버스였는데, 베를린 공식 투어 버스노선인 100번과 200번으로 슈프레 강 북쪽과 주요 관광명소를 돌아다니고, 슈프레 강 남쪽을 돌아다닐 때는 주로 M29번을 타고 다녔다.
베를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건물들과 벽.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말고도 길 곳곳의 벽을 장식한 그래피티들이 멋있는 데다, 마드릿과는 다르게 황량하고 도시적인 건축물들을 보며 거리를 돌아다니기만 해도 좋았던 기억. 서유럽/남유럽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 나서 중앙/북유럽 쪽을 더 다녀보고 싶은 마음이 들 지경. 얼핏 중구난방인 듯하지만 전체적인 도시의 그런지한 느낌은 일관되어서 너무 좋았다.
사실 여행 가기 전 베를린 날씨를 계속 보고 있을 때는 화~금 동안의 여행 중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매우 좌절하고 있었다. 우산을 챙길까도 했지만 배낭여행이기도 하고 해서 자라에서 샀던 우비와 팀버랜드 부츠를 신는 것으로 준비했는데, 비는 의외로 수요일 하루만 와서 다행이었다.
부츠, 백팩의 방수 기능이 대단해서,
그냥 '이번 여행의 추억' 정도로 끝나는 정도로 비를 경험한 느낌.
이번 여행에서는 Podo를 처음으로 써봤다. 이것도 킥스타터를 통해서 구매했던 카메라인데, 벽 등에 붙인 채로, 블루투스로 핸드폰에 연결해서 촬영을 할 수 있는 카메라.
원래 찍히는 것은 셀카 말고는 좀 부담스러워서(라고는 하지만 주목받는 것은 태생적으로 좋아함) 여행하면서 하루 정도만 썼지만, 확실히 셀카보다 더 넓게 찍혀서, 화각만 좀 적응되면 많이 쓸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셀카봉도 이번 여행에선 많이 쓰지 않았던 기억.
베를린웰컴카드를 사면서 박물관섬 무료 입장 옵션을 같이 구매했던 터라, 베를린 구 박물관, 신 박물관, 페르가몬 박물관과 붙어있는 이슬람 예술 박물관(?)을 쭉 둘러보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는 이슈타르의 문을 비롯한 바빌론 건축물들. 물론 결국 이런것들을 죄다 약탈해와서 여기서 전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리고 나서 방문한 유대인 추모 공원. 이 곳 뿐만 아니라 베를린 이곳저곳에서 끊임없이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만행에 대한 기록들이 많았는데, 최근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특히 미국 샬럿츠빌을 비롯해 네오나치즘과 결부된 사건들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이러한 기록이 계속 사람들에게 영향을 지속적으로 줄 것인지, 아니면 결국 무뎌지거나 '더 이상은 그만!'이라는 반작용으로 이어져 결국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인지.
그리고 여행 치고는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다, 멋진 곳이 여기저기 많아서 매일 꼬박꼬박 마시고 다녔음.
그리고 매일매일 커리부어스트, 슈니첼. 맥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