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피로스 Sep 04. 2020

이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백수의 고백, 레일 밖도 나쁘지 않다.

태어나서 취업 준비라는 걸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해야 할 때면

굉장한 내적 갈등이 시작된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 지금도 그렇다.

다만 다른 사람들처럼 취업하는 것만이

생의 유일한 길은 아니라 생각했고,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왔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향으로 전력질주를 하며 나아갈 때

난 저 사람들보다 더 빨리 뛸 자신이 없다는 걸 알았고,

그렇게 뛰어야 할 필요도 없으며,

그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는 저들이 가는 방향이 맘에 들지 않았다.


이미 트랙에서 많이 뒤처져 버린 나를 두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속삭여줬지만 한 귀로 흘리며 살았다.

인생이란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향으로 뛰어야 하는

하나의 레일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 레일 밖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세상에 끌렸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만이 나를 뛰게 만들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내 모습이 현실감각 없는 낙오자이거나

덜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무능한 사람처럼 보일 거다.

난 그런 게 싫다.


겉으로는 아닌 척 표현하지만

시선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무시

혹은 경멸과도 같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 백수처럼 지내온 내 수년의 시간은

본능적으로 그걸 감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어젯밤

장류진 씨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나보다 4살 연상이고,

좋은 대학의 사회학과를 나와

좋은 대학원의 국문학을 수료한 그녀는

2018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창작활동을 시작했단다.


회사생활의 경험이 있는지

책에는 이제껏 내가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화이트 칼라의 세계에 대한 내용이 가득했다.


뭘 알고 웃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저기 나를 웃게 만드는 포인트가 많았다.

회사생활 경험도 없는데도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기분이 참 이상하고 묘했다.


소설에 나온 주인공들처럼

내 주변의 평범한 회사원 친구들처럼

나도 그런 생활을 시작했더라면 어을까

하는 덧 없는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거부하게 되는

이중적인 감정을 느꼈다.


예전엔 나만의 방식대로 사는 내 모습을,

내 지나온 과거를 밖으로 드러내는 게 싫었다.

상처 받을까 봐 무섭기도 했고,

그로 인해 또 잠시나마 주저 앉을까봐 두려웠다.

타인에게 평가당하고, 무시받기 이전에

누군가의 시선 자체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가 조금씩 변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뒤부터.

유튜브를 시작한 뒤부터.


나를 오픈하는 일에 두려움이 줄었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실컷 떠들어대도

생각보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자유롭게 해 줬다.


오랫동안 어떤 강박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삶을

누군가에게 잘 설명하고 설득시켜야만 한다는.

그래야 나 자신이 조금이나마 떳떳해지고,

누군가로부터 오해와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을 거라는

그런 근거 없는 허황된 방어기제 같은 것 말이다.


최근,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독서토론 모임을 한다.

첫날,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고

나는 당당히 나를 '백수'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웃었다.

희한한 사람이네.

재밌는 사람이네.

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말았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더 이야기했다간 그들의 호감 섞인 미소와 웃음이

언제 또 잘 포장된 무시와 경멸의 표현이 될지 모르니까.


그런데 다음 모임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보고 싶다.

"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취업준비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이다.


왜일까.

이제는 뭔가 그냥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그냥 해버려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조금은 머뭇거리고, 주저할 것 같지만.

옛날처럼 연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구구절절할 필요까진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는 게

이젠 별로 창피하지도, 부끄럽지도,

두렵지도 않을 것 같다.


왜냐면

그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으니까.

그들의 시선은 내게

잠시면 사라질 하나의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동안 내게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뭐랄까

좀 더 안정적인 기분이랄까.

뭐든 상관없다.


아무튼 그냥

이젠 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홀가분하게, 속 시원하게.

그래서 기분이 좋다.

변해 가는 내가 맘에 든다.

이런 내 모습 나쁘지 않다.


나조차도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나란 놈은 참.

그래서 재밌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리, 비우면 채워지는 미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