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sign Jul 15. 2016

아기가 태어났어요

기다리던 내 딸 다인이

딸아이의 아랫잇몸에 치아 두 개가 살짝 보인다. 이제 7개월에 접어들기 시작한 내 딸 김다인.

처음 이탈리아 밀라노에 오기 전 결심한 것들:

1. 믿음의 가정이 되자.

2. 남편의 좋은 동반자가 되자.

3. 직장을 찾아 정규직이 된 뒤 아이를 갖자.

교회 생활을 진득이 해본 적 없던 남편은 감사하게도 지난 5년 동안 신앙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잡생각 나는 설교 시간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다시 대학생이 된 마냥 설교의 요지를 받아 적기 시작했고, 가끔 그의 기도를 들을 기회가 생기면 크리스천스러운 기도 말에 깜짝 놀랄 정도가 되었다. 난 성질부리며 또 성질 죽여가며 남편의 좋은 동반자로 거듭나고 있다. 그리고 밀라노 정착 6개월 만에 놀랍게도 직장을 찾은 나는 정규직이 될 때까지 납 작업드리고 있다가 소원하던 정규직이 되자마자 아기 갖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러나!!! 아기를 갖겠다는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일 뿐이었다. 아기는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은 임신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뒤 주변 친구들이 차례차례 임신하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한국에 있는 친구들까지 임신하는 것이 아닌가! 임신한 친구들이 10쌍이 넘어갈 무렵 기다림에 마음이 지치고 피폐해졌다. 더 이상 핸드폰 어플의 날짜를 계산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밀라노로 여행 오실 부모님 맞을 준비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기다리던 우리 다인이가 생겼다. ^^


201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나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짐가방을 싸고 만쟈갈리(Mangiagalli) 산부인과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아기를 낳으면 아플까?'라는 두려움보다는 초음파로 곧 다시 만날 우리 '꼬망이'(아이의 태명)가 더 궁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과 나는 둘 다 의연했다. 친정부모도 없이 해외에서 단 둘이 아기를 낳겠다는 결심은 어렵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기간이 아기의 예정일이었기에 남편도 휴가를 끌어모아 3주 정도 회사를 쉬기로 했고, 나 역시 잘 통하지 않은 이탈리아어지만 아기와 산모를 사랑하는 병원 관계자들을 믿기 때문이었다. 5일만 더 참으면 해를 넘기게 되기에 초음파 검사를 하며 의사에게 유도분만을 하지 말고 5일만 더 기다려보면 안 되겠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의사는 이유를 물어봤고 난 수줍게 해를 넘기고 싶어서란 이유를 말했다. 그녀는 한국적인 사고방식이 재미있었던 건지 깔깔 웃으며 나더러 입원실로 들어가라 한다. 

 

입원실의 두 침대. 내 옆의 산모는 경험자이다. 밤 11시 소등이 다가오기 전 남편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유도분만제를 투여하기 시작했다. 옆의 산모는 첫 번째 투여에 반응이 오기 시작, 날 두고 먼저 분만실로 향했다. 이제 입원실엔 나와 아가의 심장박동 소리만 뚜뚜뚜뚜뚜 채워졌다. 그 사이 다른 산모가 옆의 침대를 차지했다. 새벽 2시 반 쯔음 시작된 통증이 이상하리만큼 몸에 딱 달라붙어있다. 처음에 간호사를 호출했을 땐 더 기다려보라 한다. 새벽 5시 반. 통증은 가시지 않고 있다. 간호사를 재호출 했다. 그는 이제 분만실로 가야 할 타이밍이란다. 아픔을 딛고 남편을 먼저 호출한다. 짐승의 울음이 들려오던 분만실 복도에 들어섰다. 나는 무통주사를 신청했다. 다행히 무통을 맞을 수 있는 상황이었나 보다 너무 아픈데 주사가 들어가니 움직이지 말란다. 아픔을 덜기 위해 지금의 아픔을 참아야 하다니... 남편은 무통 주사 투입 후 분만실에 들어왔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젊은 의사가 나의 진행상태를 확인하더니 빨간 버튼을 누른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 주변에 갑자기 의사와 간호사로 구성된 한 10명쯤 되는 한 팀이 일사불란하게 제 자리를 잡더니 나보고 힘주란다. 어떻게 호흡을 하는지 몸소 보여주신다. 무통 천국을 맛본 지 얼마 안 되었지만 하란대로 힘을 줘봤다. 그렇게 한 세 번 힘을 주니 다인이가 나왔다. 탯줄과 태반보다 작은 아기 다인이가 나왔다. 2.24kg. 17킬로 넘게 살이 찐 엄마의 살이 부끄러운 몸무게였다. 공상과학영화가 내 다리 밑에서 방영되는 느낌이었다. 아기가 나오고 기다란 탯줄과 보라색 빛의 아기 그리고 아가의 울음... 혈색을 찾는 얼굴빛. 모유 수유를 한다 했기에 처치가 끝난 아기는 내 가슴 위에 올려졌다. 무게가 적게 나갔지만 눈을 똘망하고 얼굴은 반반했다.

분만실에서 나온 나는 병동을 지정받기 전 다른 산모들과 같이 침대에 누워대기 했다. 간호사의 지시대로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 아기에게 젖을 물려봤다. 요 녀석! 작지만 매달려서 젖을 빤다! 옆의 아가는 다인이보다 큰데도 젖을 진득이 빨지 않는데...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보이는 요 작은 녀석이 순간 기특하면서도 눈물이 핑 돈다. 


남편의 좋은 직장 덕분에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는 우리는 프라이빗 병실을 예약했으나 대기 상태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퍼블릭으로 들어간 2인 병실을 혼자 쓰게 되었다. 돈을 내지 않고 개인 병실을 쓰게 된 것이다. 오히려 프라이빗 병실을 쓰면 2인 1실이기에 옮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인이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혈액에 당이 부족하다며 ICU로 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다인이는 2주간 지내게 된다. 그때는 그게 감사한 일이 될 줄 몰랐다. 여리디 여린 아가를 며칠 만에 퇴원해서 집에 왔으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덕분에 남편과 나는 2주 동안 편안히 밤에 잠을 잘 수 있었고, ICU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을 보며 육아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나의 몸은 아기를 낳은 뒤에도 바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가뿐했고, 다인이의 입원기간 동안 교회 식구들의 따뜻한 정신적 물질적 지원이 끊이지 않아 마음속 감사가 끊이지 않았다. 내가 퇴원 후에는 남편과 매일 데이트 나가는 심정으로 다인이를 보러 병원에 출근했다. 생각해보면 작년 겨울은 온통 따뜻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