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에서 일본의 동물공원에서 여왕개미가 죽어 개미 군체 하나가 몰락하는 과정을 전시하였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댓글의 대다수는 ‘일본을 넘어서 한국의 현실을 보여준다, 저출산 사회의 모습이다.’라며 현실에 대입하는 반면, ‘외부 종과의 교류가 물리적으로 제한된 환경이라 일어난 일’이라는 지적 또한 있었다. 물론 곤충이 몇 세대에 걸쳐 쌓아 올린 군집이 쇠퇴하는 과정을 단순화하여 인간 사회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외부 종과의 교류가 원천 차단된’이라는 환경적 조건이다.
오쓰카 에이지의 <감정화하는 사회>는 ‘감정화’라는 개념을 통해 즉물적으로 반응하는 사회를 통해 문학의 죽음을 지적하고 있는 책이다. (물론, 1부가 사회 비평, 2부가 문학 비평으로 이루어져 있고, 1부에서 제시한 저자의 생각을 바탕으로 2부가 전개되는 형식이지만, 2부의 볼륨이 압도적으로 크기에 문학 비평서라고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이 책에 대한 소회를 밝히기 이전에 필자가 오래전부터 간직해온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몇 년 전, 대학교 동기의 소개로 모종의 술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동기는 나보다 한 살 아래 동생이다.) 그곳에는 만난 적 없는 동기들의 고등학교 동창생들로 가득했는데, 그중 한 명이 나와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말하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올라간 사람이었다. 성공을 맛본 지 며칠 안 된 20대의 남성이 얼마나 기고만장해 있었겠는가? 그는 술자리에 참여한 모든 인원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세미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대일로 아이스브레이킹을 빙자한 문답을 시작했는데, 이는 곧 일면식이 없는 나 대신 내 옆에 위치한 동기에게 향했다. 취업 준비로 무엇을 하고 있냐는 상투적이지만 문맥상 꽤나 공격적으로 들리는 질문이었다.
동기는 중립주의자라고 표현하면 굉장히 이상하게 들리겠으나, 입버릇처럼 ‘모든 문화는 존중받아야 하며, 모든 의견은 가치가 있다.’며 열린 자세를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삶의 자세는 차치하고, 그는 그렇기에 ‘어떠한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된다.’라는 이유로 자신의 의견을 숨기곤 했는데, 그때도 그러했다. 동기는 머뭇머뭇거리며 계속해서 대화를 중단시키고자 했다만, 당시 분위기는 그러한 발버둥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술자리는 면접을 보는듯한 분위기로 변질되었고, 6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일제히 동기를 바라보았다.
내심 대답을 하지 못하는 동기도 답답했지만,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막연히 당시의 분위기 또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동기는 끝내 말을 아꼈고, 이내 그가 ‘그럼 평소에 무엇을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져왔다. 동기는 주저하다가 책을 읽고 있다며 조용히 말했고, 당연 그래야 한다는 듯 ‘무슨 책이냐?’며 심층 수사를 하기 시작했다. 동기가 말을 하지 못하자, 제일 구석에 앉아 있던 한 명이 자신도 책을 읽는다며 자신의 독서 이력을 피력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책 이름을 언급하였다. 심지어 검색을 해서는 자신이 읽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받고 싶다는 것처럼 그에게 보여줬다. 자연스레 ‘책 자랑 대회’는 술자리 모두가 참여하게 되었고, 모든 시선은 나를 다음으로 동기를 향했다.
동기가 끝내 털어놓은 책은 유튜버 ‘간다효’가 쓴 정치 대중 서적이었다. 동기는 갑작스레 사실은 자기가 좋아하는 유튜버가 있고, 이 유튜버가 얼마나 객관적이며, 이 유튜버가 쓴 책이 굉장히 효용성이 좋다는 식의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내 흥이 식었는지 그는 다시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놓으며,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사업이 있다며 자신은 직업이 있으니 하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했으면 좋겠다며 무책임한 소리를 늘어놓는 것으로 그날의 기억은 끝났다.
근데 왜 이날의 기억이 이다지도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나는 순간 동기를 동정한 것일까, 그리고 ‘간다효’라는 사람의 책을 읽는다고 했을 때 내 마음 은연중에 생겨난 경멸은 무엇을 향하는 것일까.
필자는 이 물음에 전혀 답을 하지 못했다. 단순히 배배 꼬인 내 심성 때문일 것이다. ‘동기로부터 은연중에 드러난 선민의식을 읽어냈기에, 그것이 곧 자기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이 말이 나 스스로에게 그나마 떳떳할 수 있었기에 성급히 결론 내리곤 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활자 근본주의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일절 없다. 책을 읽는데 소모한 나의 시간을 보답받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 책을 읽었다는 것조차도 누군가로부터 인정 욕구를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즉, 누군가에게 감정 노동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쓰카 에이지의 책 <감정화하는 사회>는, 1부에서는 전체 사회상을 조망하는 듯하다가, 2부에서는 문학 비평으로의 전환을 감행하는 듯 보인다. 특히, 1부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천황의 옥음’ 이라던가, 인터넷 문화 속의 노동 소외 현상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대부분 현대에서 다루어지는 사회적 문제이고, 이는 실질적으로 몸소 체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에 반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듯 느껴지는 ‘스쿨 카스트 문학’에 대한 비평, ‘언문일치체’에 드러난 내면화된 일본의 모순, ‘AI 소설론’, ‘메신저 문학’, ‘성숙 불가능 문학’, ‘기능성 문학’ 등, 현재의 사회적 문제들을 문학 비평을 통해 바라보는듯하면서도, 요인 자체를 문학적 요소로부터 끌어내려는 느낌을 받는다.
필자가 느끼기에는 저자의 ‘근대 문학에 대한 비평’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비평’은 어떻게 해서 ‘문학’이라는 영역이 사회로부터 단절된 채, 타자의 자아와의 마주침을 거부한 문학이 (타자와의 알력, 사회와의 알력 다툼을 포기해버린 문학이 ) ‘자아 표현’만을 위한 문체로 죽어가게 되었는지를 조망하기 위함이며, 현대의 신자유주의 체제하에 발전한 기술 문명이 자아 표현의 특권적 장으로서의 문학을 그저 ‘기능성’을 위한, 유용한 것이라는 새로운 심미관에 복속하게 된 과정을 조망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지탱하는 사회와 문화의 존재 양식이 없다면 그 언어는 유지될 수 없다. (….)언문일치란 언어적 위기의식과 사회적, 문화적 비판 의식을 동반하는 언어적 지각변동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언문일치, 일본 히도츠바시대학 이연숙 교수
여왕개미를 죽인 것은 무엇일까?
‘감정화’란 사람들의 온갖 자기 표출이 ‘감정’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상호 욕망하는 관계를 의미한다.(p.9)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인용하는데, 스미스에 따르면 타인의 ‘행위’와 ‘감정’에 대한 ‘공감’이 사회 구성의 근간에 놓인다. 자기 내면에 ‘중립적인 관찰자’를 두고 그것이 자신과 타인의 ‘감정’ 및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형성하는 단계를 밟아 ‘규범’과 ‘도덕’이 형성된다. 즉, 감정적으로 자기 이익만을 본능적으로 좇는 측면과 타인에게도 윤리적이려고 하는 측면이 인간에게는 양면적으로 존재하는데, 저자는 이를 조율해야 할 회로 즉, ‘중립적인 관찰자’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중립적인 관찰자는 정치, 미디어, 문학의 형태로 외화 되고 제도화되었지만(p.15), 현재 심각한 기능 부전에 빠졌다고 말한다. 이 중심에는 신자유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필자는 ‘감정 덴노제론’ 이라는 이름으로 덴노가 발표한 옥음을 통해 민의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분석하며 ‘감정화’한 사회를 조망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그가 최종적으로 이끌어내는 ‘상징 덴노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감정 노동’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자.
전후 70년이라는 큰 시기적 고비를 넘기고 2년 뒤에는 헤이세이(平成) 30년을 맞는다. 나도 80세를 지나면서 체력 등의 면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느끼곤 한다. 최근 수년간 천황(일왕)으로서 스스로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 자신의 할 바와 책무에 관해 생각했다. 오늘은 사회 고령화가 진행하는 속에서 천황도 이제 고령이 된 경우 어떤 존재방식이 바람직한지, 천황이라는 입장에서 현행 황실 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삼가면서 나 개인으로서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을 말하고 싶다.
즉위 이래 나는 국사 행위를 하면서 일본 헌법 하에서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천황의 바람직한 위상이 어때야 할지를 날마다 생각해왔다. 전통의 계승자로서 이를 계속 수호한다는 책임을 깊게 인식하고, 날로 새로워지는 일본과 세계 속에서 일본 황실이 어떻게 전통을 현대 속에 살려나가며 생생히 사회에 스며듦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몇 년 전에는 두 차례 외과수술을 받았고, 고령에 따른 체력 저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앞으로 종전처럼 무거운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곤란해질 경우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국가에, 국민에게, 또한 내 뒤를 이을 황족에게 좋을지를 생각하게 됐다. 벌써 80세를 넘기고, 다행히 건강하기는 하지만 점차 신체 쇠약이 진행하는 것을 감안할 때 지금까지처럼 전신 전력을 다해 상징으로서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천황의 직위에 오른 이래 거의 28년, 그동안 나는 우리나라의 많은 기쁨과 슬픔을 국민과 함께 했다.
나는 이제까지 천황의 책무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을 최우선 했다. 아울러 큰일을 맞이해서는 때로는 사람의 옆에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동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천황이 상징인 동시에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천황이 국민에게 천황이라는 상징의 입장을 이해해달라고 구하는 한편 천황도 스스로를 깊이 이해하고 항상 국민과 함께 한다는 자각을 자신의 몸 안에 키울 필요를 느껴왔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각지 특히 원격지와 섬을 여행하는 것도 나는 천황의 상징적인 행위로서 중요하다고 느껴왔다.
황태자 시절을 포함해 지금까지 나는 황후와 함께 거의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으며, 어디에도 지역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견실하게 떠받치는 서민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천황으로서 소중한,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을 위해 기원한다는 책무를,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와 경애를 별다른 준비 없이 받은 것은 행복이었다.
천황의 고령화에 따른 대응 방식이 국사 행위와 그 상징으로서 행위를 한정 없이 축소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천황이 미성년자이거나 중병 등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천황의 행위를 대행하는 섭정을 두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천황이 충분히 그 위치에서 요구하는 책무를 수행하지 않은 채 생애를 마칠 때까지 계속 천황으로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천황이 건강을 해쳐 심각한 상태에 이른 경우 이제껏 보았듯이 사회가 정체하고 국민 생활에도 다양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 더욱이 지금까지 황실 관례로서 천황의 죽음을 맞이하면 엄중한 장례절차가 거의 2개월 동안 이어지고 그 후에도 장례에 관한 행사가 1년간 계속된다. 그처럼 번거로운 행사와 새 시대(신임 천황)에 관한 갖가지 행사가 동시에 진행함에 따라 행사 관계자 특히 유족은 대단히 힘든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사태를 피할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슴에 남아있다.
모두에 말했듯이 헌법상 천황은 국정에 관한 권능이 없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 우리나라의 유구한 천황 역사를 새삼스럽게 돌아보면서 앞으로도 황실이 항상 국민과 함께 하고, 서로 힘을 합쳐 이 나라의 미래를 쌓도록, 그리고 상징적 존재인 천황의 공무가 언제라도 중단 없이 안정 정적으로 이어져나갈 것을 충심으로 염원하며 이렇듯 나의 심경을 토로했다.
국민 여러분의 이해를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처: 뉴시스 신문 이재준 기자 / 아키히토 일왕, 조기 퇴위 영상 메시지 전문 )
그는 덴노가 덴노 자체를 기능으로 정의하면서 덴노제에 대한 정치적 의견을 피력함과 동시에, 헌법에 대한 개입이나 정치적 행위가 일절 금지된 덴노이기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에 호소하는 형태’의 글을 취할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한다. 즉, 덴노는 정책에 일절 관여할 수 없으므로, 국민의 감정에 공감하는 역할만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고, 국민 또한 덴노에게 단지 그것만을 요구했다. 즉, 덴노가 ‘개인으로서의 마음을 이해해돌라는’ 요청은 ‘인간으로서 감정 노동에 온전히 봉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피력하는 인간 선언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오쓰카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이 ‘타자에 대한 이해’를 인간 본래 선천적인 것으로 제시한 한계점을, 실천적인 방향으로 극복하려 했던 야나기타 구니오의 ‘언문일치체’를 언급한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에 언문일치체는 ‘내면화’된 문체로 등장했고, 이는 곧 ‘마음’만을 말하는 문체였다. 사회와 외부로부터 단절된 문체는 곧 현재의 문학에서 ‘문학의 감정화’라는 현상으로 드러났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감정’에 대해 이성적이어야 할 언어를 정치에서부터 저널리즘, 문학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파묻어버렸다. 우리는 우리에게 편안한 감정을 주는 언어만을 정치에, 저널리즘에, 문학에 요구했고, 그런 유저의 요구에 그들은 너무나 쉽게 굴복했다. 우리는 내면의 자신의 불쾌함을 관찰하는 중립적 제3자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공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판조차도 ‘감정’의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즉 타인의 ‘감정’을 모두가 함께 비웃는 감정의 소비가 한편에서 비대화 되고 있다.(p.46) 여왕개미는 개미 군집에서의 하나의 생식 기관에 불과하다. 생식 기관을 잃은 군집은 곧 쇠퇴하게 된다. 신자유주의가 ‘중립적인 관찰자’라는 여왕개미를 죽였다.
폐쇄된 공간을 향하며….
1) 플랫폼에 종속된 무상 노동자들
저자는 디지털 세계관을 조망하며 ‘이야기 노동론’을 전개한다. (저자의 의도에 맞게 쓰려면 세계관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한 줄로 감히 요약을 해본다면 ‘신자유주의가 문학의 ‘내용’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자아와 ‘자기표현’은 한 몸이다.(p.72) 우리는 유저이자 창작자로써 플랫폼에 참여한다. 이전의 동인지 시절에서 있어 왔던 2차 창작 구조에서도 창작을 강요받으며 종속되는 노동 소외 현상은 있어 왔다. 하지만, 인터넷 속에서의 무상 노동은 비물질적이며 비가시적임과 동시에 어느 정도의 자발적 형태를 띠고 있다. 심지어는 실시간으로 자신의 모든 행적들이 데이터화되는 ‘무상 노동’을 강요받으면서도 편안함마저 느낀다. 인터넷이 보급되며 자기 자아를 표출하는 방법의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이는 무상 노동에 의해 생성된 콘텐츠들로 인한 플랫폼의 유지를 성립시켰다. 이제는 잊혔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구설수에 올라있던 ‘우왁굳’의 저작권 소동과 더불어 지적되었던 창작자들의 무상 노동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인터넷은 유저 친화적이다. 즉, 유저의 모든 행적이 맞춤 서비스를 위한 데이터 제공으로 이어지고, 이는 심미적 규범, 규준을 추출해 내기 위한 '비물질 노동'이 된다. 유저의 소비와 창작자로서의 자아 표출은 쾌락을 동반하여 무상 노동에 동반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안락함을 느끼며 노동 구조에 종속된다. 유저가 자발적으로 제공한 ‘비평’도, ‘평가’도, '별점'도, 모두 다 '비물질 노동'으로 환산되어 무상 노동자로 전락한다.
2) 계급의 재등장에 패자의 문학은 어떻게 죽어가는가.
저자는 <스쿨 카스트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신자유주의 경제를 배경으로 또다시 등장하고 있는 ‘계급’의 재등장을 예견하는 문학의 태도를 지적한다. 저자는 아사이 료의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를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스쿨 카스트 장르 속 주인공들은 모두 ‘상하’의 전복, 계급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자신들 스스로를 ‘카스트’ 외부에 위치함으로써 특권적으로 ‘카스트’ 내부를 부감하며 평가한다. 즉, 자기 자신을 당사자의 위치가 아닌 외부자의 위치로 상대화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입증하려는 욕구를 가진다는 것이다. 오쓰카는 이러한 태도가 '사회학자'의 것과 닮아 있음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언문일치라는 근대적 문체를 통해 작가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외부’에 서서, 전체를 조감하기만 한다고 지적한다. 즉, 작가는 결국 카스트 최상위에 위치함으로써 ‘부감은 하지만 제도를 의심하거나 반전시키려 하지 않는다.’(p.95) 여기서 ‘부감하는 서술자’=‘언문일치를 통해 등장한 작가’에 대해서 다른 논문을 잠깐 인용한다. 이 문장을 읽어보면 저자가 말하는 바가 적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확실히, 작중 세계 밖에 있는 인식주체로서의 서술자의 존재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작중 세계와 전혀 단절된, 이차원의 공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도 아니다. (….) 안과 밖이 평평하게 육지로 이어져있는 작중 세계의, 그 경계 바로 바깥에 서서, 작중 공간과는 그 어떤 관계도 없으나, 작중 공간의 보이는 적당한 위치에서 대상을 파악하고 있는, 마치 투명인간 같은 존재다.’
-한일 근대 소설과 언문일치체, <부운>과 <무정>의 시점 - 박진수
사회학자 스즈키 쇼의 <교실 카스트>는 최종적으로 ‘제도의 결함’을 ‘카스트 제도 속 하에 속한 이’에게 부담시키는, ‘감정 관리’를 요구하는 것으로 결말짓는다. (예컨대, 대안 학교를 다닌다던가, 카스트 제도의 기준과 다른 것에서 성취를 얻는다던가 등의 대안이다. 이는 곧 '패자'에게 감정 관리를 요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이는 아사이 료의 소설과 동일한 결론에 다다른다. 즉, 제도의 문제를 알고 있지만, 제도의 해체를 말하지 못하며, 심지어 제도를 용인해야 함을 문학과 사회학이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체제를 의심하는 서브컬처는 ‘악’인듯하다.’라는 저자의 지적은 꽤나 날카롭지 않을 수 없다.(p.100)
오쓰카가 인용한 라이트노벨 <그저 그것만으로 좋았습니다>는 스쿨 카스트 제도 흑막의 친족에게 안겨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그곳에는 혁명은 없다. 단지, 승인 욕구를 향한 감정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3) 문학에서의 ‘묘사’의 죽음
‘문호 메신저’를 아는가? 문호 메신저란 근대소설을 ‘라인’(한국의 카카오톡과 같은 애플리케이션) 과 같은 방식으로, 근대 소설을 대화 형식을 통해 전개하는 앱이다. 이 친절한 메신저는 대화가 없는 순수 묘사 파트는 “본 적도 없을 만큼 긴 안내 메시지" 형태로 나타낸다. ‘불편함’을 직관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다. 독자는 귀찮다면 귀찮은 대로 생략해도 좋다. 읽기 불편하다면 과감히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읽는 행위의 생리적 리듬을 라인으로 형성한 독자가 소설을 포함한 언어의 독자 중 일부를 이루고 있는 만큼, 이러한 생리는 당연히 문학에 변화를 요청하는 압력이 될 수밖에 없다”(p.134)
앱의 작품 목록에는 ‘읽기 편함’이라는 심미 기준에 의해 종합된 근대 소설들이 나열되어 있다. 즉, 유저 친화적인 애플리케이션의 “친절한 노동 구조”에 의해 라인 독자의 ‘생리’에 맞는 근대 소설의 “새로운 카테고리”가 생겨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학의 변질’은 일본 근대문학의 특성상 필연에 가깝다고 분석한다.
연단 위에서 들려주던 이야기를 문학으로 변환시키는 ‘언문일치체’ 시도에서 근대 문학의 문체가 성립되었으니, 메신저와 같이 ‘발화’ 하는 형태의 문학으로의 이행은 당연하다는 것이다.(p.143) 기존의 문학, 문체를 다루지 못하는 ‘아마추어’를 위한 근대 문학의 문체가 바로 언문일치체이다. 한자어를 배격하고, 보편적인 언어로서의 일본어만을 추구한 언문일치체는 ‘전달되기 쉬운 인공적인 일본어’이자 ‘영어로 변환해도 의미가 통하는 일본어’이다. (p.146)
더 나아가, 이러한 언문일치체는 문학사에서 여성들의 자기 발언인 ‘와타시가타리’의 일종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와타시가타리’란 ‘나’를 화자로 하는 글을 뜻한다. 자기 자신의 경험담, 일기, 자서전은 물론 일본 문학의 사소설이 포함된다. (p.150) 즉, 언문일치체는 ‘집 안’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여성들에게 요구된 ‘문체’이다.(p.159) 오쓰카가 인용하는 미즈노 요슈의 <어느 여자의 편지>에는 신체도, 현실도 부재한 ‘마음’만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언문일치체가 드러난다.(p.164)
이러한 문체는 무수한 ‘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독자들이 작가라고 착각하게 되는 ‘나’ , 가상의 ‘나’, ‘문호 메신저’ 속의 작가로서의 ‘나’는 언문일치체와 1인칭 소설이라는 조건만 달성하면 손쉽게 따라오는 결과물인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과연 ‘문호 메신저’에서의 작가로서 아이콘화된 ‘다자이 오사무’는 과연 작가로서의 ‘나’인지 단지 데이터베이스를 학습한 기계로서의 ‘나’인지 심지어 AI로서의 ‘나’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GROK의 혐오 발언과 인종 차별적 발언은 단지 무분별한 데이터를 학습한 결과물이 아니던가?
인터넷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를 근간부터 뒤흔들었다. (루소적 독자와 저자의 관계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죽음은 도래했고, 수많은 민중들이 작가의 위치를 점하기도 하고, 이야기에 영향을 주며 새롭게 갱신하는 등, 기존의 수신자와 발신자의 관계는 무너지고 한층 복잡해졌다. 즉, 저자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자기표현은 근대적 자아와 한 몸이다. 인터넷은 작가라는 특권 계급만이 아니라 만인에게 자기표현의 기회를 개방했다.
우선 수용자는 ‘유저’라고 불림으로써 보다 쾌적한 환경을 권리로서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창작자나 발신자는 낮은 수준에 맞춰서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발신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게 되었다. 애초 책임이라는 개념을 가지지 않는 인간이 발신권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제한하거나 혹은 리터러시(쓰고 정보를 다루는 능력)로서 키워가는 틀이 제공되지 않고 있다.
(출처: 씨네 21 / 김일림 대중문화 연구가 / [스페셜] 만화 원작자이자 일본 대중문화 비평가인 오쓰카 에이지와의 대담)
즉, AI들은 무차별적인 자아 표현을 통해 생성된 채 인터넷을 표류하고 있는 수많은 ‘나’를 학습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성된 ‘나’는 ‘감정화’되어 ‘마음’만으로 구성된 문체를 구사하는 이상, 현실과 역사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신자유주의의 경제 속에서 귀속될 곳이 없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젊은 ‘나’들은 인터넷을 통해 과격한 사상에 감화되는 것이다. (p.158)
앞서 말했듯, AI에게는 ‘현실’이나 ‘타자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의 문예 비평가 에토 준의 문체론에 의하면 문체란, ‘작가의 행동이 사회나 타자와 알력을 빚으며 일으키는 ‘불꽃’이다.’ (p.180) 하지만 현대의 문학은 AI와 동질화되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문학의 구전화를 통해 AI와 동일하게 ‘형식 노력’을 추구하며 “발전” 하고 있다. 문학 연구자 막스 뤼티에 따르면 ‘구전화’란 끊임없이 ‘형식’을 향해가는 것이다. 그는 민속학적인 콘텐츠는 수신자의 참가로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지적했다. 즉, 구전문학은 발신자의 이야기에 수신자가 참가하는 집합적 문학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p.173) ‘형식’이란 집단적 문학의 형성 과정에서 종합되는 단어, 어군, 제재, 모티프 등을 뜻한다. 따라서, 형식을 만들기 위한 노력 ‘형식 노력’에 의해 문학은 전개된다. 이는 AI가 문장을 만들어가는 알고리즘과 동일하다. 단순히 앞선 문장의 뒤에 무엇이 와야 하는지, 기존의 데이터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 확률을 계산하여 배치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숙달된 작가와 단순히 형식 노력을 학습한 초보자는 무엇이 다른가. 옛날이야기의 형식화는 곧 추상화인 셈이며, 온갖 요소가 추상화=평균화되는 만큼 ‘묘사’ 또한 불필요해진다.(p.189)
근대가 그 상상력의 대부분을 소진해버린 작금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 장치의 생산량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생각도 성립하리라. 애당초 상상력이라는 동력원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이니 20세기가 끝나려 하는 지금, 소설이라는 장르가 유행에 뒤처지는 것도 역사적 필연이라 해야 할 것이다.
(….)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강요를 의심케 할 정도로 - 동일한 뼈대의 서사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밝혀내고 (….)
따라서 공동체 유지, 강화의 기능을 지닌 소설은 ‘소설적 상상력’을 결여한 채, ‘서사적 보편성’에 무릎 꿇은, 소설적 외관만을 갖춘 소설 엇비슷한 그 무엇에 불과하다. (….)
작가들이 자신들의 소설적 상상력의 쇠퇴를 이미 알려져 있는 신화, 전설, 이야기로 보강하면서 소설의 언어를 써가기 때문으로 …. 근대가 경험한 제반 모순이 후퇴하고, 이를 대신해 고대나 중세의 서사적 틀이 언어를 형식화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다 한들 전혀 이상할게 없다.
‘소설의 종언’ 이후의 일본소설론 -하스미, 오쓰카, 아즈마 , 안천
문학은 지금 양가적인 두 갈래의 요구로부터 응답하고 있다. 구전화, 집합화라는 전근대로의 회귀와 ‘언문일치’라는 근대적 재귀가 표리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제도 하에 어떤 배경과도 상관없이 누구나가 손쉽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인터넷에서의 ‘언문일치’ 운동은 ‘나’의 고유성과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손쉬운 도구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 공공과 현실, 역사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탈 사회화되어 있는 ‘나’가 있다. 상당수의 독자는 책에서 즉효성 있는 정보만을 원한다. 단일한 감정을 서플리먼트처럼 자극해 주는 기능성 문학을 원한다.(p.197) 에토 준의 문체처럼 더 이상 사람들은 작가와 소설, 세계 간의 알력 문제나 작가 외부의 문제, 즉 ‘타자’와의 접촉을 원하지 않는다. 타인의 자아가 세계와의 알력 끝에 표출되는 문학을 더 이상 선호하지 않는다. 이러한 욕구에 응답한 ‘유저’는 무한 소급되는 구조 속에서 ‘형식 노력’을 하며 안락한 문장을 생성한다. 이는 곧 ‘감정 노동’에 대한 요구에 응답하며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플랫폼’을 위해 또다시 무상 노동을 행한다.
웨인 부스에 의하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평가란 소설 독법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독자들 또한 작품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독서는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며, 그러한 윤리적 판단이라는 측면에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서술이라는 근대 문학의 환상은 기만이다. 즉, 초월적 서술자가 자신의 권위를 티 나게 내세웠던 고전소설에서, 헨리 제임슨에서 완성된 ‘중개되지 않는 현실로서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근대소설의 역사가 서술자를 중성화시키고 메타 레벨에 위치시키는 데 있는 것은, 소설이 가진 스스로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서술자가 독자에게 ‘말을 걸 때’만이 독자는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소설은 윤리적일 수 있다.
<소년>의 순문학 번역과 복수(複數)의 내면 형식- 근대소설의 성립과 문체 형성에 관한 시론, 이지훈
오쓰카는 현재 문학은 기능 부전에 빠졌음을 지적한다. 독자에게 '불편함'을 제공하는 것도 원래 문학의 기능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쓰카는 ‘타자와의 알력을 통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편함'을 직면하고 이를 통해 사회 전체상을 반추하게 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표현하기를 ‘기능성 문학’이라고 불리는, 습득하기 손쉽고 그것을 읽음으로써 직관적이고 즉효 한, 복잡한 알력 다툼 없이 묘사가 없는 가성비 좋은 글, 그런 글이 유행하고 그렇지 않은 글은 기피되는 현재가 과연 근대 이후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 그는 묻는다. 바로 이것이 그가 여러 책에서 '안일한 현대 문화 비평'을 양산하는 일본의 몇몇 포스트모더니스트를 비판했던 주된 논점이다.(p.295)
더 나아가, 저자는 범죄소설(범죄를 일으킨 후, 범죄자들이 쓴 소설들을 일컫는다.)을 통해 근대 성장 문학을 조망한다. 그는 일본 근대 문학이 성숙을 다루는 데 있어서 최종적으로 ‘타자의 결여’라는 모순성으로 귀결된 것을 비판하는데, 책에서 다루어지는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자. 그 대신, 그의 다른 저서를 살펴보자. “피해자화”라는 표현은, 전 글에서도 다루었지만 ‘타자’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무한히 읊조리는 형태로 귀결되는 죽은 말에 불과하다.
과거에 소설이 누렸던 상징적 위상에 미련을 두고 있던 순문학의 영역은 자기 폐쇄적인 순수성에 집착해, 그들의 사회 기반이었던 사회로부터 괴리되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소설의 종언’ 이후의 일본소설론 -하스미, 오쓰카, 아즈마 , 안천
범죄를 ‘행동’이라고는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가해자’다. ‘가해자’로서 자각함으로써 그들이 비로소 ‘물보라와 물길을 남길’ 수 있었음은 이미 살펴 본 바다. 이는 ‘역사’도 마찬가지다. 금세기에 접어들어 외면하고 싶기까지 한 일본 문학의 쇠퇴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삼는 역사관이 성립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는 아시아의 인근 국가와 좌익이 ‘올바른 역사’를 왜곡하여 상처 입게 된 피해자이며, 범죄 보도에서도 ‘가해자’ 측에 서서 생각하려는 문학가와 비평가는 존재하지 않고, 누구나 ‘피해자’에 동일화한다. ‘주위의 현실과 격돌하여 만들어내는 방전 현상의 불꽃’은 일어나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일본은 피해자화하고 있다.
내가 지진과 원전 사고 이후의 소설에 어떤 감탄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쓰카 에이지, <범죄소년문학론>
원치 않는 타자와의 만남을 주도하는 글은 그저 차단하면 된다. 그럼으로써 전 글에서 언급했던 ‘기술적 유토피아’가 도래한다.(정보적 유토피아라고 일컬어도 괜찮을 것이다.)
옮긴이는 글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한다. ‘편안하고 안락한 답변을 원하는 이들은 그런 해결책에 대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라고 반응하며, 확신에 찬 말투를 구사하는 테드 TED 식, 혹은 유튜브식 '구두 강연'에 빠져들어 설득되곤 한다. 요 몇 년 간 TV에서 '교양 있어 보이는' 강연형 프로그램이 유행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