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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풍 박석준 Jul 04. 2022

여행을 시작하다


  작년 여름 초입이었다. 뜬금없이 모란 시장에 가자고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그곳은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제법 큰 장이라고 했다. 십여 년 전 그곳을 지날 때마다 보았던 역겨운 풍경 탓에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친구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장이 서는 곳이 예전 장터가 아니라 시에서 새로 마련한 곳이라서 깨끗하고, 볼 것도 많다고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에 어린 시절 장마당에서 놀던 추억을 떠올리며 함께 가자고 한 친구의 마음이 좋아서 참석한다고 했다. 이매역 1번 출구에서 점심 무렵에 보자는 약속 이외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떻게 갈 것인지, 장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 친구가 알아서 할 것이니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심사였다. 지금까지 여행이나 소일거리에 대해 그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전화를 받자 더욱 따라나서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었다. 

  그 친구는 가요경연대회에 나와 큰 인기를 끈 가수와 이름이 같았다. 그 가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친구의 이름이 왠지 인기만화의 주인공 ‘독고 탁’과 같다는 착각을 하곤 했다. 아이 결혼식 알림에도, 내 책 발간 소식에도 한동안 반응이 없어 궁금했다. 몇 개월 후 그의 근황을 친구가 전했는데, 눈에 이상이 와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치료 중이라는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는 그를 모임에서 다시 만났다. 미리 준비해 간 책을 전하자 며칠 만에 따뜻한 독후감을 보내온 친구였다. 그런 그가 주말에 보자고 한 것이었다.

  장이란 말은 어린 시절 추억과 같은 뜻으로 다가온다. 하얀 광목 차양 아래 펼쳐진 온갖 좌판들과 화장을 진하게 한 소녀 가수를 데리고 나타나 장터를 유행가로 덮어 버리는 약장수며, 대포 같은 소리를 터뜨려 모두를 놀라게 만드는 뻥튀기 장수까지 모두가 아련한 기억이다. ‘국산품애용’이란 간판 아래 양은그릇을 잔뜩 쌓아 놓은 빙고 게임장의 ‘당첨’ 이란 스피커 소리도 귓가를 맴돈다. 

  그래서인지 도시의 재래시장이 어린 시절 장터와 거의 같은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좌판에 널려진 여러 가지 물건과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혼잡한 곳이면, 약장수와 뻥튀기 장수가 없다고 해도 장터 맛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쇼핑의 편리함이나 쾌적함만을 따지자면 굳이 시장을 배회할 이유가 없었다. 시장에 가는 이유는 무엇을 사고자 하는 것보다 그저 여기저기 기웃거릴 수 있는 편안함과 이 골목 저 골목 어디에서든지 드나들 수 있는 자유로움, 겉모습을 보지 않고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보통사람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장이 대형마트처럼 쇼핑의 편리함과 쾌적함을 쫓아 모습이 점점 달라지고 있다. 시장을 현대화해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데 뭐라고 탓할 수 없다. 시장이 좋아진다는데 반대할 이유도 없다. 현대화의 교활함과 예전 시장의 어설픔이 뒤섞여 이도 저도 아닌 시장이 되어 버릴 것 같아 두렵다. 시장에서 몸으로 느꼈던 추억들이 모두 사라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구와 약속한 날은 하필 토요일이었다. 토요일 고속도로 혼잡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타고 갈 광역버스가 휴일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 편안하게 오고 갈 수 있다는 것에 안심했다. 뜻한 것은 아니지만 출발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검소한 여행이 되어 버렸다. 

  나를 생각해서 잡은 만남 장소는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간 후 지하철로 갈아타야만 갈 수 있었다. 탄천 옆으로 난 산책길을 걸으며 장터로 간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매역에서 만난 우리는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산책길을 걸어간 다음, 탄천을 따라 걸었다. 첫 여행은 호화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한 시간 이상 다리품을 팔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초로의 남자 세 명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어떤 주제가 되었든 이야기를 이어가면서도 공감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에 놀랐다. 

  친구는 이번 만남의 목적이 장 보기가 아니라 정신정화 체험을 위해 네팔의 포카라로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함이라고 했다. 여행 시기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곳에 가기 전까지 한 달에 한 번 우리나라 장터를 보러 가자는 말에 선뜻 그러자고 했다. 난 네팔의 포카라 여행보다 장터 여행이란 말에 더 호감이 갔다. 어디를 갈 것인가는 전부 그 친구가 결정하고, 다른 친구는 차를 대기로 했다. 앞으로 여행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오일장이라고 했지만, 시골의 장터 맛이 나지 않았다. 도시 한 복판에 펼쳐진 장터라 그런지 동네 마트에 가도 쉽게 보고 살 수 있는 물건뿐이었다. 찐 옥수수와 볶은 땅콩을 샀다. 맛도 그저 그런 맛이었다. 상업주의에 물든 전문 장사꾼만이 넘쳐나는 장터였다. 

  지금까지 내 여행은 과정을 무시하고 목적지 위주의 여행이었다. 어디를 가기로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갈 방법을 찾고, 그곳까지 가는 동안 스쳐 가는 풍경이나 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번 모란 시장 여행을 그렇게 했더라면 재미없는 여행이라고 실망했을 것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긴 했지만, 금세 그쳐서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도시 한 복판에 이렇게 잘 꾸며진 산책길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개발이란 이름 아래 아파트, 첨단 지식산업센터, 지하철 등이 선도적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얻은 혜택이다. 개발에서 소외된 지역은 차별당했다는 열등감 때문에 개발의 목소리를 더 크게 낼 수밖에 없다. 신이 정성을 다해 가꾸어 낸 아름다운 산과 들을 무참하게 뭉개버리는 개발을 너도나도 부르짖는 이유일 것이다. 

  광역버스 의자에 노곤한 몸을 맡기자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다음 여행에 대해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은 채 서로 마음만 확인했다. 첫 여행은 장 보기를 위한 장터 여행이 아니라 앞으로 여행을 위한 마음 다짐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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