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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풍 박석준 Jul 12. 2022

호조벌, 생명과 나눔의 땅

지금으로부터 삼백 년 전, 조선은 시흥시 포동 걸뚝에서 하중동 돌장재까지 약 720m 정도 되는 호조(戶曹)방죽을 쌓아 바닷물의 흐름을 막았다. 호조방죽이 만들어지자 북쪽 소래산과 서남쪽 군자봉 사이로 흐르는 은행천과 보통천 주변에 약 150만 평[4.96㎢]이나 되는 넓은 벌판이 만들어졌다. 현재 시흥시 미산동, 은행동, 안현동, 매화동, 도창동, 포동, 물왕동, 광석동, 하상동, 하중동이 이 벌판에 걸쳐있다. 호조방죽은 바다로 떨어져 있던 옛 인천부와 안산군을 이어주는 길이 되었으나. 39번 국도가 생기면서 예전 모습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았다. 사람들은 호조방죽을 걸뚝이라고 불렀는데, 기록에는 진청언(賑廳堰), 석장언(石場堰)이라는 명칭도 보인다.  물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쌓은 둑을 ‘방죽, 축방’이라고 불렀다. ‘방죽, 축방’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둑방’은 현재 표준어로 보기 어렵다. ‘둑방길’이란 표현은 ‘방죽길, 축방길’로 쓰는 것이 맞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전국의 농토는 황폐해졌다. 백성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숙종 46년(1720년), 조선은 감독기관과 관리를 지정하고 군인을 동원하여 호조벌 조성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721년(경종 원년)에 완공하였다. 호조(戶曹)의 관할 아래 있던 빈민 구제 기관인 진휼청(賑恤廳)에서 호조방죽을 쌓아 만든 벌판이라 하여 호조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경종 원년(1721년) 12월 6일, 승정원일기에는 ‘안산과 인천 두 읍의 경계에 제방을 축조하여 논으로 만들 수 있는 곳이 있어 별도로 감독관을 정하고 군을 동원해서 공사를 시작하여 지금 완성했습니다. (安山仁川兩邑之境 有可以築堰作畓之處 故別定監官 雇軍始役 今已完畢)’라는 기록과 함께 ‘서울 근처에 이렇게 수백 석을 얻는 논을 얻었으니 진실로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확보된 토지는 대부분 논으로 사용했다. 바닷길이 둑으로 막히자 주변 어민의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호조벌 일대는 어촌과 농촌이 어우러지는 마을로 변하기 시작했다. 호조벌 주변에는 땅을 경작하기 위해 삼남 지방에서 많은 농민이 모여 들어와 정착하면서 촌락이 형성되고, 포구는 이름만 남긴 채 사라졌다.

  갯벌을 논으로 바꿔 벼를 심기 위해서는 땅속의 소금기를 빼야 하고, 농경에 필요한 물을 끌어들여야 했다. 수리 시설을 만들어 가면서 호조벌을 생명의 땅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호조벌이 조성된 지 이 년이 지난 경종 3년(1723) 5월 25일에는 인천과 안산 사이에 새로 쌓은 호조방죽 때문에 피해를 보아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승정원 기록이 있다. 장마철에 보통천과 은행천의 물이 제대로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해 주변에 있는 농토가 자주 물에 잠기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윤회가 아뢰고, 또 논하기를, ‘혜청(惠廳)에서 축조한 인천과 안산의 해언(海堰)은 재화(財貨)만 허비하고 백성들의 전답에 피해만 끼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즉시 허물어 버리고 그 일을 맡은 자를 잡아 가두어 엄한 벌을 내리소서’ 하니, 최석항이 ‘백성들의 호소(呼訴)가 사실이 아니니, 다시 죄의 유무를 캐어 살핌이 마땅합니다.’ 임금은 ‘단지 그 일을 맡은 자만 가두어 치죄하라.’ 고 명하였다. (會仍申前啓, 又論 惠廳所築仁川安山海堰, 徒費財貨貽害民田。請卽毁破, 任事者囚禁嚴刑。 崔錫恒言 民訴非實, 宜更摘奸。上只命囚治任事者).

  윤회가 또 아뢰길, ‘민진원이 진휼 당상을 할 때, 인천과 안산의 두 읍 사이에 방조제를 신축했습니다. 청컨대 책임자 유덕기, 이세영, 장진도 등을 감금하여 엄하게 벌을 내리십시오.’라고 하였다. (會又所啓 向者閔鎭遠爲賑恤堂上時 新築海堰於仁川安山兩邑之間. 請首倡任事者兪德基李世榮張震燾等 囚禁嚴刑)

  호조방죽을 축조한 책임자는 진휼 당상(賑恤堂上) 민진원(閔鎭遠)이고, 실무 책임자는 유덕기(兪德基), 이세영(李世榮), 장진도(張震燾) 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토목사업을 하다 보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일어난다는 것, 사고의 책임은 언제나 실무자가 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호조방죽은 '일(一)' 자 모양의 둑이다. 둑의 안산 방향 끝 하중동 돌장재에는 보통천에서 내려오는 물을 관리하는 흥부 배수갑문, 인천 방향 끝 포동 걸뚝에는 은행천에서 내려오는 물을 관리하는 포동 배수갑문이 있었다. 두 갑문(閘門)은 하천의 배수와 해수의 역류를 막아주는 방조 기능을 겸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갑문으로 사용되던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호조방죽과 같은 둑을 쌓는 조선 시대 관청은 제언사(堤堰司)였다. 조선 초에 존재했으나 사라진 제언사는 수리행정을 위해 현종 대에 들어와 재건되었다. 호조판서와 진휼청이 제언사무를 전적으로 주관토록 하였다. 숙종 때에는 비변사 당상 한 사람을 제언 당상으로 임명하고, 영조 때에는 제언사가 비변사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뒤에는 별다른 변화 없이 존속되다가 대원군의 제도개혁으로 1865년(고종 2년) 비변사가 의정부에 예속하게 되자 제언사도 의정부에 편입되었다. 근대화과정에서 제언사는 폐지되었다.

  다양한 생명체가 숨 쉬며 살아가는 호조벌이 언제까지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벌판으로 남아있을까. 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호조벌판이 이십 년도 안 된 지금 고층아파트와 도로에 오히려 둘러싸였다. 뱀내 장터에 마을이 들어서고, 은행마을이 아파트 단지 아래 묻힌 것처럼 개발이 곧 발전이란 이름으로 호조벌도 어느 순간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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