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시방 위험한 즘생,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
하노이에서 계같은 백수생활 하고 있습니다.
어감이 좀 그렇기는 한데 그 어감이 맞습니다. 정말 계같아요. 쉽지 않아요.
하지만 진짜 계처럼, 두고보면
언젠가 한번 큰거 터질 것 같기도 해요.
곗돈 모으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계가튼 백수생활을 공유해볼게요.
[두번째 도전, 바퀴벌레 앞에서 흔들림 없이]
이게 왜 도전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국인이 바퀴벌레 앞에서 망설임 없이 휴지를 집어 든다는 것은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번지점프를 뛰는 것과 같은 용기라고 생각한다.
과거 내 친구는 새로 이사한 집에서 바퀴벌레를 발견하곤 계약한 지 한달도 되지 않아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그 친구는 김동현을 닮은 신체 건장한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대개 하노이의 아파트는 바퀴벌레가 기본 옵션이다.
그래도 난 27층에 살 거니깐 괜찮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처음에 입주한 날, 바퀴를 마주했을 땐 그들의 당당한 몸놀림에 압도당해 괴성을 지르며 주저 앉을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난 다르다.
적군이 보이면 덤덤하게
휴지와 살충제를 꺼내 들고
후퇴를 모르는 전사가 된다.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전사로 만든 건
작년 10월, 냉장고 대첩이었다.
작년 10월 난 처음으로 하노이에서 부동산 계약을 했고, 이사를 끝마친 날 저녁, 생각없이 냉장고 앞에 갔다가 손가락 세 마디 크기의 바퀴를 봤다.
(세 마디의 기준은 새끼 아닌 검지)
비무장지대라고 생각했던 그 곳에서 주저앉아
한참을 대치하다가 살충제로 선제 대응을 했다.
하지만 가볍게 회피하며 냉장고 밑으로 이동한 뒤
장기전을 준비하는 바퀴를 보며 난 또 한번 무릎 꿇었다.
이때 방에 들어가 있던 여자친구가 싸움의 승패 여부를 물어봤는데 그저 “아 몰라!!!”라며 갸냘픈 목소리로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난 패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목소리만으로 내가 패배자라는 걸 증명한 것 같다.
냉장고 앞에서 허망하게 무릎꿇고 한참을 있다가 용기를 내어 냉장고 밑을 바라봤다.
핸드폰 조명으로 둘러보니 바퀴는 이미 어디론가 떠난 것 같았는데 그래선 안되지만 사실 난 이때 안도했다.
싸움을 피하고 싶은 패배자의 본능이
그들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켰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떨리는 도가니를 부여잡고
냉장고를 직접 들어 (이건 진짜 용감했다)
사상자 없음을 확인한 뒤
냉장고를 받치고 있던 선반을 꺼내
화장실로 돌아가 청소했다.
방으로 돌아가 여자친구에게
‘더이상의 바퀴는 없다’며 종전을 선포했다.
그리고 흥얼거리며 화장실에서 선반을 씻던 도중
비명을 외치며 화장실 밖으로 기어 나왔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그때 난 꽤 긴 시간 줄담배를 핀 것 같다.
그러다간 홀린듯 전쟁터로 돌아가
욕을 크게 내뱉으며 싸움에 임했고, 난 승리했다.
회고하면 당시 난 바퀴를 생포해야만 한다는 어려운 미션까지 감내해야 했다. 바퀴는 터질 때 알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이다.
그래서 살충제 총알이 바닥날 때까지
방아쇠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의 난 파이어뱃이었다.
그렇게 힘든 전투를 끝낸 뒤
한동안은 PTSD에 시달리며
흩날리는 낙엽만 봐도 사시나무처럼 떨었지만
이제는 웬만한 바퀴에는 주저하지 않고
총을 꺼내든다.
종전이 아닌 휴전 상황이기에
매일이 5분 대기조 같은 긴장상태지만
그래도 괜찮다.
확실한 주적관이 생겼고,
그렇게 난 후퇴를 모르는 전사가 됐다.
적어도 개미를 만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