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에 읽은 미국 트라피스트 봉쇄 수도원의 수도사인 토마스 머튼의 “고독 속의 명상(Thoughts in solitude)” 그때는 그의 자구에만 있어도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무조건 사서 읽었다. 30여 년이 지나 다시 읽은 지금, 특정 종교 안에서 말해야 했던 그는 답답했을 것같다. 종교의 본질을 추구하는 수도사들과 의례에서 마음의 안정을 제공하는 대중종교 사이에는 늘 갈등이 있어 왔다.
전체주의가 모든 면에서 인간의 인격을 격하시키고 타락시키려고 광분하는 시대에...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피조물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기질은 하느님의 선물로 그분이 오실 때까지 늘려야 하는 달란트이다.
감정이 때때로 이성을 방해한다고 해서 감정이 영적 생활에 무용한 것은 아니다.
통회는 감정의 질을 높인다.
영적 생활은 사고나 감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성적 동물로 산다는 것은 동물로 사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 사고함을 의미한다.
극기는 진정한 자기 포기이다.
자기를 포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되어 있어야 한다.
사랑의 은총 안에는 모든 미덕이 숨겨진 채 잠재돼 있다.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는 열렬함으로 얻어진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어떠한 모험을 대가로 치르고서만 하느님 나라를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을 신뢰하면 모든 것이 내게 힘이 되고 건강이 되고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와 배은망덕 사이에 중립적 입장은 없다.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함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사랑받고 존경받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보잘것없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
영적 삶을 인간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뿌리 뽑혀 천사들의 영역으로 옮겨 심어진 삶이 아니다.
묵상은 영적인 인간이 스스로 항상 깨어 있게 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이다.
우리 자신이 가난에 만족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느님께 그만큼 더 가까이 있다.
가난은 자유에 이르는 문이다.
자기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가난은 물건을 사용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몇 가지 이점을 우리로 포기하게 만드는 어떤 태도이다.
당신은 나를 절망이 아니라 겸손에 이르게 하십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며 우리의 관심사들도 그다 중요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기 위해 종(鐘)은 우리의 근심 걱정을 깨뜨리며 울린다.
침묵 속에 있는 존재들이 참된 침묵을 만든다.
그분이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나의 침묵은 무한한 생명의 침묵이 된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는 우리에게 살아 존재하라고 명하시는 하느님이 계신다.
성스러운 삶이란 우리 내부의 모순을 화해시켜서 그 모순들이 우리 내부에 남아있으면서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만드는데, 이 성화(聖火)는 침묵 속에서 삶을 의미한다.
모순은 인간 영혼 안에 항상 존재한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치고 정말로 살기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음을 알게 된다.
하느님의 침묵을 우리 자신 안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안에서도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영원히 지닐 침묵을 찾아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 것을 중단한 것이다.
우리의 침묵은 말이 아니라 자기의 말을 남이 들어 주기를 바라는 조바심이다.
나의 기도가 나 자신에게만 집중돼 있다면, 기도가 다만 나 자신의 풍요로움만 추구한다면, 나의 기도는 자체가 나를 가장 산만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진실로 관상적인 모든 영혼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분이 계신 곳에 그들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을 내다보며 광야로 이끄는 그 길을 예견하고 갈망해야 한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성부의 말씀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고독 속에 주어지는 생명의 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