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공간은 현실이 아니다. 페이스북 친구 5.000명, 실재 친구는 1명도 가능하다. 올라온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고 그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가 올린 글은 검증 받을 필요도 없다. 페북 안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만들어진다. 페북은 일종의 환상이다. 심지어 프로필 사진도.
그러나 교제하는 대상이 있고, 사진이 있고, 사건이 있다는 점에서 현실이다. 페북이 나르시시즘 천국이라 해도,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여기서 현실의 불안과 모욕 등을 달래고 위로 받기 때문이다. 이처럼 환상과 현실의 가교역할을 하면서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을 도널드 위니캇은 중간대상·현상(Transitional Object, Transitional Phenomenon)이라 했다. 귀찮지만, 정확히 말하면 중간대상은 매체(페이스북)이고 중간현상은 놀이(페이스북 놀이)이다.
인생 영화 한 편을 보면 주인공과 동일시됨으로 얻는 만족감이 있다. 관객이 주관에서는 주인공, 객관에서는 관객이다. 영화는 작가와 감독이 만든 주관적 허구이다. 그러나 그 감동은 객관이 되어 삶에 어떤 영향을 준다.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편하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을 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 그곳은 주관적 허구가 지배한다. 그러나 그 허구가 치열하고 불공평한 객관적 세상을 살아가는 나를 위로해 준다. 주관과 객관의 가교역할을 하며, 객관의 세계로 나오게 하는 것을 ‘중간대상·현상’이라 한다.
중간대상·현상은 일종의 놀이로서 문화, 예술, 종교, 음악 등으로 확장된다. 위니캇은 놀이가 있는 한 삶은 유쾌하고 살만한 것이라고 했다. 중간대상의 기원은 생후 6개월 이후의 아동이 특별히 집착하는(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곰 인형, 신생아 때부터 덮던 타올, 베개 등이다. 아동에게 이것은 엄마의 부재를 달래주는 주는 위대한 놀잇감이다. 이 부부분 상세한 설명은 복잡하니 생략.
삶의 낙이라고는 TV 드라마 시청이 거의 유일한 중년 후반의 여성이 말했다. “드라마, 그거 다 가짜잖아요. 이제는 가짜가 싫어요. 요즘 저는 다큐멘터리를 즐겨 봅니다.” 나는 다큐멘터리가 재미있냐고 물었고, 그녀는 재미가 아니라 정보를 얻으려 본다고 했다. 중간대상은 가짜이지만 진짜를 품고 있는 재미있는 놀이이다.
그녀는 놀이를 포기한 건조한 삶으로 진입했거나, 중간대상이 TV 드라마에서 다른 것으로 업데이트 되려는 중이다. 정신분석에서 위니캇의 공은 여기와 저기가 분리된 이원론 공간에서 제3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중간대상이 확장된 사람은 삶과 죽음을 잇는 영역을 발견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위니캇은 나는 죽을 때도 생생히 살아있기를 원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당신의 중간대상은 무엇인가요? 나는 바로 말한다. 새벽에 일어나 글쓰기와 혼자 또는 함께 걷기. “글쎄요. 좀 생각해 보고요”라고 한다면, 중간대상인 놀잇감이 부재하거나 얄팍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공격성과 성욕을 자극하는 것은 중간대상이 될 수 없다. 적당한 술은 중간대상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술은 공격성과 성욕을 자극하는 유흥이다. 본능을 충족시키는 유흥이 필요하지 않단 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