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 사랑? 사람은 그거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가페 사랑을 베풀까? 그렇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베푼다. 우리는 이해 못할 아가페 사랑을 받을 때, 그것을 고난이라 명명한다. 자기 스스로 사랑을 조건화시키고 그것이 참사랑인 줄 착각하고 있다. 사랑의 현실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음 두 가지를 요구한다.
첫째, 그가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기를 바란다. 명품 가방, 맛있는 음식, 고급 액세서리, 여행, 스킨십, 자동차 및 주택, 주로 본능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를 원한다. 상대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지 확인 받으려는 이러한 욕구는 탐욕스럽기까지 하다. 형이상학적인 인생 이야기는 공허하다. 그거로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중년 이후의 재혼은 물론 초혼도 조건대 조건의 만남이 되고 있다.
둘째,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기를 원한다. 그가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흡족한 상태, 뜨거운 연애 시절을 회상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가 내 옆에 있지 않아도 내 옆에 있는 것 같은 일관성 있는 상태. 앉으나 서나 그대 생각으로 기쁨에 젖은 상태. 본능의 충족과는 거리가 먼 이런 경험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성장시킨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두 가지를 다 요구한다. 나도 상대의 이러한 요구에 응함으로 사랑은 성장한다. 도널드 위니캇은 전자를 대상으로서의 엄마, 후자를 환경으로서의 엄마라고 했다. 이 두 가지의 엄마는 생애 초기에 유아가 엄마에게 요구한 것들이다. 유아는 엄마의 헌신적 돌봄으로 본능 욕구를 충족 받는다. 본능이 충족된 유아는 엄마는 늘 나와 함께 한다는 굳은 믿음이 생긴다. 그러면 엄마와 얼마간 떨어져, 홀로 있어도 유아는 엄마와 함께 있는 것 같은 정서적 안정을 얻는다. 홀로 그러나 함께 하는 능력은 여기서 나온다.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이 두 가지, 전지전능한 환상의 흔적이 외부로 투사되어 무의식중에 그런 대상을 원한다. 그래야 행복할 것 같다. 삶이 힘들고 고단하면 유아기로 퇴행하여 더욱 그런 엄마를 갈망한다. 채워주고 정서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사랑. 우리는 생애 초기에 잠깐 있었던 엄마와의 짜릿한 이 경험을 아가페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 사실 아가페 사랑의 목적은 단맛에 있지 않고 인간성장에 있기에 가혹할 때는 욥의 시험처럼 가혹하다.
중년 이후에는 대상/환경으로서의 엄마를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 세상에 그 어떤 존재도 나에게 두 가지 엄마가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이전 삶을 통해서 알았다. 그런 대상은 아주 가끔 화학조미료 같은 것으로 경험해도 충분하다. 내가 나를 먹여주고 나를 만족시키는 내적 자원을 내 안에서 발굴해야 한다.
중년 이후에도 어장관리라는 명목으로 인간관계에만 연연하면, 발굴되기를 원하는 내적 자원은 다 놓친다. 하나를 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장에서 봉투 하나 더 오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그 하나를 얻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