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나온 곳과 떠나갈 곳을 아는 사람
장수는 이제 복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주도 아니다. 그냥 자기 몫이다. 요즘은 꼭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내 친구들을 대상으로 구두 설문조사를 해 보면 대략 80이면 족하다고 한다. 더러는 70세가 가장 이상적이라고도 한다. 일없이 병들어 시간만 보내는 것은 안 사느니만 못하다고 한다.
치매가 와서 인지 기능의 상실로 요양원으로 가야 하는 시간이 온다면, 그것은 최악이라 한다. 나는 친한 사람들에게 딱 75세까지만 살다 간다고 말하곤 한다. 가족들에게는 아직 비밀이다. 사람이 생명의 연수를 어떻게 임의로 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과 다 합의 했다고 말한다. 마음을 그렇게 먹으니 정말 하나님과 합의해 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마터면 오래 살지도 모른다.” 그게 걱정이란다. 나는 80을 넘기고 90을 넘긴다는 생각을 해봤다. 내가 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는다면, 심지어 식사와 용변까지 다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그래서 자식들에게 짐이 된다면 어떨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이다. 아니면 건강관리를 잘해 90까지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면, 내 삶에 의미가 있을까. 황혼 우울과 경제적 어려움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오래 살아도 그만큼의 이유는 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래 살 것에 대비해 오래 사는 동안 견고한 영적 뿌리가 되어줄 큰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나이 60만 넘으면 몸에 아픈 부위가 생기고 마음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울 모드로 진입한다. 노화가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진입할 준비가 됐다고, 땅의 것에서 정을 떼는 의례를 시작하는 거다. 마음이 오랫동안 주거한 몸을 완전히 떠나면서 의례는 끝난다.
그래서 나이 60에 철든다고 한다. 사람이 생애주기에 누리는 행복 중 가장 고품질의 행복은 땅의 것들과 어느 정도 거리두기를 한 60세 이후일 것이다. 60 이후에도 여전히 땅의 것에 집착하고, 땅의 것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은 수양의 부족이다. 허약한 몸을 능가할 내적 양식이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당신이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땅의 것들과 거리두기를 연습하는 거다. 거리두기가 된다면, 가장 중요하다고 한 것들이 뜻밖에 하찮음을 발견할 것이다. 행복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하찮아지면서 얻는 마음의 정화와 상승작용이다.
“이 세상은 소풍이다.” 초등학교 때 소풍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 일주일 전부터 설렌다. 가기 전날에는 내일 비가 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한다. 준비는 노련한 엄마가 다 해 주신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와 학교 운동장에 결집했을 때는 먼 우주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마음이 들뜬다. 게임, 노래자랑, 보물찾기 등의 순서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자유 시간을 마친 즈음에는 서서히 집이 그리워진다. 엄마에게 보고할 이야깃거리를 생각해 둔다.
대문을 열면 대청마루에서 나를 기다리던 엄마가 환하게 웃으시며 나를 반기신다. 엄마는 배낭을 받아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신다. “아들아, 소풍 잘 갔다 왔구나.” 나는 엄마 품에 와락 안긴다. 성인의 삶은 물리적 엄마를 떠나 하는 소풍이고, 죽음은 다시 영원한 엄마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엄마를 깊이 신뢰했던 자식은 소풍 중에서도 엄마의 사랑을 기억한다. 만일 우리가 영원한 엄마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면,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임을 깊은 경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세상살이가 소풍인 사람에게 더 이상의 깨달음은 필요치 않다.” 모든 깨달음은 여기서 나온다. 돈 한 푼 안 들어가는 꼭 필요한 노후대책은 “세상살이는 소풍”에 대한 각성이다. 나는 곧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내가 여기서 할 일은 가능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배우는 거다. 여기서 사유하고 경험할 것은 많으나, 가지고 갈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거기 가서 할 이야기 거리를 수집하려 세상에 온 것이다. 물론 가서도 배움은 계속될 것이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학교에서 이미 다 마련한 소풍 일정을 걱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풍 놀이를 위한 최소한의 것들은 엄마가 다 준비해 주셨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빈 배낭으로 가야 엄마가 기뻐하신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마음은 가벼워지고 단단해진다. 그가 떠나온 곳과 돌아갈 곳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아들아, 지구소풍 잘 갔다 왔구나. 힘들었지?” 나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마중 나와 나를 반길 것이다. 먼저 지구소풍을 마친 부모님은 지구소풍이 힘들다는 것과 그런데도 지구소풍은 사람을 크게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 부모님은 강한 광선을 쇨 수 있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 치유할 것이다. 나는 지구소풍의 삶을 돌아보면서 잘잘못을 가려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귀한 교훈을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들 것이다. 삶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된다. 나는 또한 뒤따라오는 나의 자식들에게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오래 사나, 짧게 사나, 그것은 아무 문제도 안 된다. 어차피 각자의 시간표에 따라 날이 저물면 다들 집으로 돌아간다. 모든 걱정은 미래에 관한 것, 미래는 미래가 걱정하게 하라. 다만 지금 여기에서 소풍을 즐기면 된다. 과거를 사는 사람은 후회하고, 미래를 사는 사람은 걱정한다. 이게 다 소풍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다. 소풍이고 싶지 않아서다. 하마터면 오래 살아도 괜찮다. 보고 들은 것이 많으니 집으로 돌아가면 할 이야기가 더 많지 않은가.
가나심리치료연구소 박성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