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래서 죽음을 영혼의 벗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죽은 탐험기
사람은 죽는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나도 죽는다. 죽음 이후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런 물음을 가졌다. 나는 막연히 하나님은 계시다 믿었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는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칠팔십년대 교회 설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른들은 천국 가려고, 지옥 가는 것이 두려워 교회로 나왔다.
사후세계가 그렇게 단순한 걸까, 하는 의심이 내게 있었으나 그 거대한 힘을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린 나도 믿어지다가도 믿어지지 않았다. 한편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 죽음 이후에 좀 특별한 대접을 받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믿음이, 어린 내게 있었다. 이런 단순한 믿음이 기초가 되어 나는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6년 동안의 신학 공부가 내 의문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신학은 나에게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게 해줬고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방향 설정은 분명히 해줬다.
분석심리학과 죽음
이후 나는 신학적 한계에 부딪혀 정신분석학을 공부했고, 이어 분석심리학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죽음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그러던 중, 분석심리학자 융의 죽음관을 알게 됐다. 융은 사람은 죽어서 그곳에서도, 이 땅의 연장선상에서 개성화(자기 성장)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계속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 시기에 나는 각개 국어로 번역된 예일대 교수 셀리 케이컨의 베스트셀러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었으나, 크게 실망했다. 저자의 시도인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파헤친 죽음이 죽음이겠는가? 그 책은 직선의 세계에서 공간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 나에게는 사변적 철학 서적 정도였다.
나는 융의 집단무의식, 동시성의 원리 등을 이해하면서 죽음 넘어 존재하는 그의 세계관에 마주쳤다. 그가 생전에 출판하지 않고 제자들에 의하여 출판된 “레드북”은 융을 신비주의자 또는 영지주의자로 볼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융은 그의 심리학은 레드북에 대한 주석이며 증명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융의 세계관은 나에게 생소했으나, 생소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인지하고 있던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일깨워주고 되새김질하게 해줬다. 이것은 막연하지만, 강한 느낌으로 왔다. 그의 심리학적 화두인 “개성화”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는 것이다. 이후 나는 사석에서 “융은 나의 막역지우”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했으나,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세월호 참사, 죽음의 실체에 관심을 가지다
2014년 4월, 아직 꽃도 피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 배 안에 갇혀 익사 당하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나는 괴로웠고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며, 죽음을 묻는 제자의 말을 일갈했다고 한다. 공자의 말이 죽음의 물음에 정답일 수 없다. 이후 다방 면에서 얼마나 많은 연구가 있었는데. 만일 공자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죽음을 알면 삶을 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인터넷 서점 어딘가에 금서처럼 죽음의 의문을 풀어줄 책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검색하던 중 하늘의 도움을 받았다. 최준식 교수의 얇은 책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죽음학 강의”를 찾았다. 이 책은 세월호 참사 3개월 후, 2014년 7월에 출간됐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죽음의 신기루들이 서서히 벗겨지고 있었다. 나는 “그렇지, 맞아”하며 속으로 맞장구를 치며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소개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주문해 읽었다. 책들은 죽음과 삶에 대한 새로운 것들을 말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것들이 새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전에 익히 알고 있었으나 기억의 언저리에서 밀려난 것들을 다시 확인 절차였다.
죽음을 알면 삶이 보인다
이처럼 죽음 공부를 하고 나니, 덩달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나는 칼 융의 분석심리학을 다년간 강의하였으면서도, 융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학자의 이론보다 학자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융의 삶을 이해해야 했다.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이해에 따른 삶을 공부하고 나니 융의 세계관이 분명히 보였다. 융의 복잡한 심리학 이론이 더욱 명쾌히 내 앞에 드러났다. 나의 분석심리학 강의의 수준은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성의 원리 안에서 3차원을 넘어, 4차, 5차, 6차 등 다차원에 대한 이해를 제시하는 분석심리학에서 죽음 이해는 일부일 뿐이다. 융은 그의 제자들과 인도 여행을 하면서 내가 전생에 인도의 구루(영적 스승)였단 말을 했다고 한다. 융이 이 말을 무겁게 했건 가볍게 했건, 삶의 목적은 성장에 있다는 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내 의식 안에 있던 죽음에 대한 막연한 상상을 분석심리학이 밝혀 주었고, 최준식 교수의 저서에서 소개된 많은 책은 구체적 이해를 줬다. 여기에 신학과 영성에 대한 나의 오랜 탐구, 그리고 20년 정신분석심리치료를 하면서 얻은 임상 자료까지 더해, 나는 죽음과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죽음이야말로 영혼의 벗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도는 됐다. 그러나 이 점은 분명히 하자. “죽음은 여전히 신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내가 죽음에 대하여 눈이 뜨이기 시작할 때, 깨닫게 알게 된 것 몇 가지만 정리해 본다.
1)사후세계는 존재한다.
2)그곳은 각자의 영적 성장 분량만큼 매우 평화로운 곳이다.
3)그곳은 영적 성장 수준이 비슷한, 즉 파동이 비슷한 영혼들끼리 군집을 이룬다.
4)거기서도 성장은 계속된다.
5)지구는 고통이 많은, 영적 성장을 위한 최적의 장소이다.
6)그래도 저승보다 이승이 좋다는 말은, 그래도 이승이 저승보다는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