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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소대나무 Sep 28. 2020

사모곡(思母曲)

사모곡(思母曲)



많이 늙으셨다. 시장가는 길, 막내아들 잡아주던 하얀 옥수엔 어느덧 검정이 내려 황갈색의 주름이 졌다. 작년이 칠순. 하필 생신이 나이 마흔 다되어 늦장가를 간 막내아들 결혼식이 겹쳐 당신께서는 생일상도 마다하셨다. 아들에게 갈 복이 당신에게 오게 된다며...



“집에서 놀모 모하노? 이 나이에 받아주는 곳이 있다는 게 중한기지”

아들들의 만류를 한사코 뿌리치시곤 기어이 고집을 피워 인근 하우스 농장으로 ‘소일거리’를 나서시고야 만다. 작업거리는 매일 바뀐다. 하우스 정리·청소부터 비료운반, 농장 작업자들 식사 준비 등 잡일 등을 주로 담당하시는데 요 몇 달간은 수출 나가는 딸기를 계량해 포장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 해외 물량이다 보니 국내 스케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주말 없이 작업이 잡히고 또 금세 익어버리는 생물을 다루는 업무 특성상 기껏 잡혔던 작업스케줄 변덕이 잦아들 날 없다. 젊은이에게나 소일거리지 농사일은 칠순 넘긴 노인에게는 ‘노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한 일이다. 



당신에게도 싱그러웠던 아가씨 시절이 있었다. 네 귀퉁이 닳은 흑백앨범을 뒤지면 검은 생머리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당신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 흑과 백. 색이 대비되어 그런지 낯이 더욱 희다. 사진 옆에는 젊은 시절의 지아비가 어색하게 서있다. 무능했던 사람.

지아비는 중매로 만나 연애하던 시절에 그 흔한 극장구경 한 번 시켜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더란다. 야구경기에서 6회 말이 넘어가면 관객을 무료로 입장시켜주듯 당시에도 영화 상영 후 한 시간정도가 넘으면 무료로 관객이 입장할 수 있었는데 데이트는 항시 그 무료찬스를 이용했더랬다. 술과 담배 살 돈은 있었던 지아비는 꼭 당신의 평생 반려자가 될 사람과 그런 식으로 데이트를 해야만 했을까.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내외는 만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혼사의 예를 올리고 부산의 한 어촌마을에 터를 잡았다. 이후 마냥 무능하기만 한 줄 알았던 지아비가 의외의 사업수완을 발휘하며 부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어부들이 낚아온 수산물들을 손질해 저온 보관하다가 시세가 좋을 때 경매에 내놓는 ‘저장사업’을 했는데 예상보다 꽤 수지가 좋았다고 한다. 탄력 받은 지아비는 분수를 잊고 빚을 내어 저장창고를 확장하는데 금융위기는 왜 언제나 개인들이 대출을 끌어 모은 시점에 터지는 걸까? 70년대 말 제2차 석유파동이 터지며 2년 만에 소비자 물가가 30% 넘게 급등하고 자금력 약한 개인사업자들은 연쇄적으로 도산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경제소용돌이를 비껴갈 재간이 없던 지아비는 잘나가던 청년사업자에서 삽시간에 빚쟁이로 전락했다. 당신의 삶도 종착역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지아비가 당신 몰래 지인에게 서준 보증까지 터지며 잠시나마 포근했었던 일상이 날아가고 말 그대로 집안이 거덜나버린다.

고난이 시작되었다. 영덕앞바다에서 물질을 하며 처녀시절을 보내왔을 만큼 결코 고운 길을 걸어온 삶이 아니었지만 그와는 차원이 다른 거친 삶이 당신에게 펼쳐졌다. 

당신은 매일 아침을 빚쟁이들을 돌려보내는 일로 시작했다. 지아비는 이따금씩 먼발치서 전화로 안부만 전할 뿐 마을 어귀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당신은 삯을 받을 수 있는 일이면 어떤 잡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닥치는 대로 품을 팔았다. 식당 허드렛일에 농사 잡일, 건설현장 막노동까지 뼈마디 바스라지게 현실과 싸워냈다. 당신도 사람이었다. 주저앉아 고인 눈물 닦아낸 적 왜 없었겠느냐마는 그 때마다 걸쌈스럽게 일어나 현실에 지지 않으리라 다부진 맹세를 한 것은 아마도 자식 때문이었으리라.


세 아이는 각 세 살, 두 살 터울이었다. 몸은 빼빼하고 얼굴은 새카맣게 그은 촌아이들은 눈물 구덕마저 말랐다.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집안 분위기를 알았던지 떼를 쓰거나 서로 싸우는 일이 드물었다. 당신은 그게 더욱 맘에 아팠다. 가진 것 없는 집안이었지만 아이들은 제법 총기 있게 자라나주었다. 첫 째는 수 감각이 있어 산수와 과학을 잘했고 도 대회 경시대회도 학교 대표로 참가하곤 했다. 둘째는 웅변에 능하고 리더십이 있어 반장을 도맡아했다. 성적도 좋아 상장도 자주 받아왔다. 셋째는 책을 좋아했다. 이따금씩 백일장대회에 나가 입선 정도의 상도 받아오곤 했다. 

세 아이는 반장, 학년회장 등 활동을 할 정도로 능동적이고 외향적인 학생으로 잘 자라났다. 당신은 그래서 더 미안했다. 90년대 초, 국민학생들 사이에서 겜보이, 재믹스 등 가정용 게임기가 유행이 인 적이 있다. 당신 형편에 그런 게임기를 갖춘다는 것은 사치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당신은 큰 마음을 먹고 ‘재믹스’와 게임 팩 여러 개를 사 자식들에게 선물해주었다. 가정용 게임기를 가진 아이가 한 반에 몇 명 없었던 시절이었다. 없이 살아도 자식들이 밖에 나가 친구들에게 기죽는 모습만은 보기 싫었던 심산이었을 게다. 자식들은 자존감 강한 아이로 성장해주었다. 아이들은 당신이 고된 현실에 부딪히더라도 주저앉기보다 싸우고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었다.



당신은 초인이었다. 


서른 초중반, 당신은 부산 국제시장 신발공장에서 일했다. 온종일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서 신발바닥에 본드 붙이는 일을 했다. 하루는 퇴근하던 길에 어지러움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본드 중독이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부처님에게 기도를 올리며 이 고난이 오래가지 않게 해달라고, 머지않아 희망찬 날을 맞이하게 해달라고 합장했다. 

셋째 임신사실을 속여 가며 신발공장에 출근했지만 불러오는 배를 끝까지 감출 수 없었던 당신은 결국 자리를 잃었다. 노동자가 소모품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고 ‘권리’라는 말은 배우지 못한 자에게 한없이 멀기 만한 단어였다. 퇴직금 몇 푼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당신은 끝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노라 술회했다. 

셋째를 낳고 몸을 잠시 추스른 뒤 당신이 찾았던 삶의 터전은 농장이었다. 특정농장에 고용된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작업이 있는 곳을 돌며 품을 내어주고 삯을 받았다. 하루는 잘 자란 당근을 캐어 계량한 뒤 상품 될 만 한 놈을 골라 창고로 옮기는 일을 했다. 그날 일과가 끝나자 농장주인은 말을 바꿨다. 현금이 없으니 대신 그만큼의 당근을 가지고 가라. 세상은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필요이상으로 거칠었다. 힘없는 당신은 한마디도 맞서지 못하고 다라이 한 가득 당근을 받아 왔다. 이걸 시장에 가져가 내다팔아야 생때같은 아이들 목에 미음이라도 적실 수 있다.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산골 농장에서 시장으로 걸어 나오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이 후 당신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일을 하기 원했다. 당신이 찾아간 곳은 아파트 건축현장이었다. 대기업 하청이라 급여 떼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작업 중에서도 당신이 지원한 일은 벽돌짐 나르는 일이었다. 힘든 만큼 일당이 세었기 때문이다.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 아래 당신이 의지할 것이라곤 굵은 소금 한 움큼에 생수 한 병이 전부였다. 흔한 몸살앓이 조차 없는 지천명의 여자 막노동꾼을 보고 그 바닥에서 잔뼈 굵다는 전문 일꾼들도 혀를 끌끌 차내었다. 


당신은 그렇게 근 30년, 당신 청춘의 전부를 빚을 청산하는 데 바쳤다. 그 사이 세 자식은 장성해 저마다의 안정된 직장에 취업을 했다. 당신에게 자식 복은 있었는지 첫째와 둘째가 낳은 손주들은 대학과 고등학교를 다닐 정도로 장성했다. 일 년에 두어 번 명절에 만나면 ‘할머니 사랑해요’라 말하며 당신을 안아줄 정도로 제법 의젓하게 자라났다. 

막내아들은 나이 먹고도 속을 썩이다 불혹을 이태 앞둔 작년에야 가정을 꾸리고 당신에게 며느리를 보여드렸다. 십 수 년 전 집안에 빚 구덩이를 남겨놓고 사업을 일으켜 돈을 벌어오겠노라 집을 떠나갔던 지아비는 이웃 도시에서 객사하고서야 연락이 닿았다. 자식들은 지어미와 식솔 고생만 시킨 아버지를 무능하다 표현하며 업신여겼지만 당신은 그런 자식들을 만류했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 고생이야 했다만 이 사람이라고 따뜻한 옷을 입어봤나, 기름진 걸 먹어봤나. 결과가 안 좋아 그렇지 다 가족들 잘되라고 고생만하다 간 사람이다. 그리고 이 사람 안 만났으모 느그들도 못봤을 꺼 아이가” 



요사이 딸기농장 소일거리에 한창 바쁜 당신이지만 아직 덜 여물은 막내 내외가 집을 가면 그 일상을 쪼개 반찬이야 국거리야 준비해놓으신다. 막내는 당신이 만들어준 김치찌개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 나이만 불혹 언저리지 당신 앞에서는 언제나 어리광부리고 예쁨 받고 싶어 하는 ‘막내아이’일뿐이다.

이태 전 척추협착증으로 고생한 당신이 이제 은퇴를 하고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연금과 자식 용돈으로 생활하기를 바라는 막내다. 당신은 일을 하지 않으면 손주 입에 단 거 넣어주는 재미를 찾을 수 없지 않느냐며 소일거리를 막아서는 막내를 나무란다. 

“내가 이리 아직 버니까 손주들 사탕이라도 사주고 느그들 찬거리도 장봐오고 한다 아이가. 내 아프면 내가 알아서 쉴 테니 걱정 말그라. 부지런떨어가 얼른 손주나 안겨주는 기 니 할 일이다.”

입씨름에서 막내는 당신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괜찮다며, 아직 청춘이라며 껄껄거리는 당신의 벌어진 이빨 사이로 드나드는 4월 꽃바람이 아직 많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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