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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소대나무 Aug 23. 2019

삐따기의 꿈

굴하지 않는 보석같은 마음 있으니..

  넌 말이다, 반골기질이 강한 녀석이었다. 자율보다는 타율이 미덕이던 90년대 후반, 넌 기성권력이 만들어 놓은 틀에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던 녀석이었다. 고2때였다. 수업시간을 3분여 남긴 수학교사는 질문 하나만 받고 수업을 마치노라했다. 교실 맨 뒤편 빼빼하고 얼굴이 새카만 학생이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 수학을 배워야하는 이유가 대체 뭔데요?”

 사춘기 소년의 불만가득한 중저음 목소리가 교실을 한바퀴 휘감고 적막함이 뒤를 잇는다. 교사는 학생을 ‘제도’라는 틀에 욱여넣고 문제에 대해 도식화된 답을 빨리 찾도록 훈련시키는 직장인이다. 그런 사람에게 허를 찌르는 질문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재기가 있을리 만무했다. 고압적인 사각턱에 덥수룩한 수염, 목선에 결후가 굵게 드러났던 교사는 혀를 말아 올릴 듯 몇 마디 얼버무리다가 시보음이 울리자 도망치듯 교실을 나섰다. 그게 네 첫인상이었다. 넌 그렇게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당연한’ 권위와 틀을 삐딱하게 쳐다보던 녀석이었다.  

 넌 어딘가 괴짜기질이 있었다. 심심한 주말, 네게 전화를 하면 통화음이 끊기곤 했다. 그럴 때면 으레 넌 김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만장대에 올라있다고 답했다. 대자연의 기운이 필시 사람 몸을 이롭게 한다는 지론을 펼쳤던 너는 반바지 추리닝에 삼선슬리퍼 달랑 갖추고 험로를 오르곤 했다.너에 따르면 넌 광합성을 통해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합성할 수 있는 신인류였다. 그뿐이랴. 넌 이따금씩 지구의 자전소리가 들리기도 하는 민감한 지각기관을 소유하고 있었고 때로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지진과 태풍을 감지해내는 영기(靈氣)가 있기도 했다. 

 넌 자유분방한 녀석이었다. 넌 성적에 맞춰 인문계고교에 진학한 것을 후회한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교과서보다 만화책 속의 세상이 훨씬 현실적이며 맹공의 가르침보다 영화의 메시지에 더 진중한 삶의 진리가 녹아있다고 말하고 다녔다. 20대 초반을 가로지르던 어느 날, 넌 일언반구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약 일주일 정도 대전에서 사업을 하는 친척 일을 잠시 도와줬다고 했다. 일과 보수, 숙식에 대한 질문에 함구하며 의뭉을 떨었다. 사실은 그 때 영화 배역 오디션을 보았노라고, 준비도 없이 매달렸고 당연히 떨어졌다며 이태가 지난 후에야 밝혔다. 탈락사실을 부끄러워하며 말을 꺼낸 너였지만 사실 난 그런 네가 부러웠다. 기성사회에 의문을 가져본 적 없이 어른들이 만든 질서에 순응해왔던 나는 대학을 나와 남들처럼 취업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인생의 공식이라고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같은 학교, 같은 반 출신이지만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네가 그날만큼은 나보다 조금 더 멋있다고 생각했다.

 20대 후반, 내가 남들이 정해놓은 노선을 따라 취업한 곳은 대기업의 간판을 단 곳이었다. 번지르르한 명함 한 장에 높은 급여와 신분의 안정이 보장되었지만 그만큼 직원의 고혈을 짜내던 곳으로 유명한 기업이었다. 새벽 6시 출근해 저녁 10시에 퇴근하는 주7일 근무제의 팍팍한 삶이 시작되었다. 높은 강도의 업무와 막중한 중압감, 그리고 스트레스에 심신이 피폐해져갔다. 당시 나에게 유일하게 쉴 곳을 내어준 사람이 바로 너였다. 격주에 단 하루 주어졌던 휴일. 널 만나면 비로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내 육신을 휘감고 있었던 ‘회사’라는 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넌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였다. 업무 외적으로 눈을 돌릴 여가가 없었던 나에게 넌 최신 문화트렌드와 신작영화, 인기 팝송 등 문화 전반적인 얘기를 해주었다. 널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이라도 알 수 있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달변의 인문학도에게 난 감화되어 갔다. 특히 개봉 영화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모습은 생소하기까지 했다. 감독의 연출역량부터 배우의 연기력, 영화 속 상징과 메시지 등 네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아마추어의 그것이라기엔 굉장히 섬세했고 또 전문성이 있었다. 그러는 시간동안 나 역시 ‘영화’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넌 글을 쓸 줄 알아서 좋겠다. 내가 너만큼만 글을 쓸 줄 안다면 평론가를 준비했을 거야.” 

 넌 끊임없이 도전하는 녀석이었다. 20대 초 영화 배역을 따내기 위해 오디션을 보았던 열정으로 이번에는 평론가가 되기 위해 글을 배웠다고. 하지만 말로 풀어내는 것과 글을 쓴다는 것은 전혀 다른 분야였고 넌 결국 ‘작문’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고 술회했다. 

 그러고보면, 너와 함께 공원을 걷고 술을 마시며 나누었던 대화의 8할은 영화였다. 반전 영화를 떠올리며 내일을 살아갈 희망을 얻었고, 영화 속 메시지를 떠올리며 삶의 고달픔을 한시름 덜어내곤 했다. 몇 년에 걸쳐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었던 ‘영화평론가’의 꿈은 자연스럽게나에게로 전이되었다. 

 도전이 삶의 모토인 너는 시나브로 영화제작의 길로 들어서려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평론가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언젠가 동네 술집이 아닌 영화판에서 서로의 이름을 맞대고 앉을 날이 올 수 있을까. ‘달성’이 아닌 ‘과정’ 자체에 의의를 두자며,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자고 했던 너. 네가 꾸었던 그 삐딱한 꿈을 이제는 내가 꾸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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