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8년을 살다 한국에 온 친구가 있다. 친구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1년쯤 한국에 머물기로 했다.
"한국에 오니까 넘 좋다. 넌 어때?"
2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내가 묻자, 친구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국 생활에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는데 한국에 오니, 또다시 이방인이 된 듯하다고 했다.
공감했다. 나 또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다르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영어라도 몇 마디 하면, 다들 나를 외국인 보듯 했다. 한국에서 35년을 살았는데, 뼛속까지 한국인인데. 어느새 난 영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제3의 존재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있지만, 어디에도 오롯이 속하지 않는 존재. 우리는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친구는 무엇보다 한국 사람들의 '기대치'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한국에는 '도리' 또는 어떤 역할에 주어지는'기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성인이 되면, 이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기를 기대한다. 아이를 낳으면 여성의 경우,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 시누이로서, 이렇게 했으면 하는 '기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여성에게 며느리로서 명절이 되면 시댁을 방문하고 시부모와 정답게 지내기를 기대한다. 엄마로서는 아이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챙기기를 기대한다.
40대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미혼인 친구는 그런 한국의 '기대치'에 딱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런 친구가 딸로서, 누나로서, 가족들에게 받는 '기대치'가 있는 듯했다.
딸로서의 도리, 누나로서의 도리, 언니로서의 도리, 누나로서의 도리. 난 한국을 떠나며 그 도리들로부터도 다소 멀어졌다. 도리를 다 하지 못해도 '영국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면죄부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영국에는 이런 '도리'가 없는가? 물론 있지만 '개인의 선택'이 '도리'에 우선하는 듯하다. 도리를 다하지 않아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납득하는 것이다. 또는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하지 않더라도, 그건 '그들의 사정'이다.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기대치'를 이야기하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말하고 보면 참 사소한 거 같은데 사소하지 않았던 '기대치'때문에 생겨난 갈등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이라는 문화권 안에는 어떤 특정 상황에서, 이렇게 해 주리라는 '기대치'가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에게도 그런 '기대치'가 있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한동안 영국인 남편에게 그런 '기대치'를 가졌다가, 혼자 실망하고 화내는 상황이 왕왕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이야기했다.
"You never asked."
"자기가 해 달라고 한 적 없잖아."
그러면 즉각적인 내 반응은 '그걸 말로 해야 아냐'이다. 난 더욱 화를 내곤 했다.
그런데 언제인가 퍼뜩 깨달았다. 남편의 말이 맞다는 것을. 나는 어떤 걸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은 채, 당연하게 남편에게서 특정 행동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행동이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를 때, 난 화를 냈다.
한국이라면 내 '기대치'는 어느 정도 당연한 것이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변명해 본다. 한국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가치, 생각이란 게 있으니까. 하지만 영국에서는 '당연한' 것이 없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표현하라고 했다. 상대방에게 요청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라고 했다.
결혼 6년차, 이제는 제법 구체적으로 남편에게 요구한다. 이것저것 좀 해 달라고. 그러면 남편은 때때로 싫어하는 기색은 비칠지언정, 대부분 바로 해준다. 덕분에 내 맘을 몰라준다고, 내가 애꿎게 남편을 탓하는 일도 현저히 줄어 들었다.
참 사소한 것 같은데, 사소하지 않았던 갈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