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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월 Sep 21. 2020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 친구들

피해자의 가해

내 주변에는 약을 복용하는 친구들이 많다. A는 약의 도움이 절실해서 복용한 친구다. B는 약을 먹다가 이제 좀 괜찮아져서 그만 복용하는 친구다. 방금 언급한 이 두 친구는 제법 건강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왜 언제 약이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 친구와, 약을 통해 다시 건강해지고 복용을 끊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건강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었다.  




명지


명지(가명)와는 연애를 시작할 수 없었다. 명지가 너무 건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명지와 연애를 시작한다면 그녀의 상처와 아픔이 다 나에게 쏟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흐릿하게 관계를 이어오던 중에 명지는 나에게 사귈지 말지 최종 선택을 요청했다. 나는 대답을 질질 끌었고 명지는 그게 거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전화와 메시지로 폭언을 쏟았다.


자살에 대한 암시였다. 만약 내가 죽으면 네가 장례식에 와서 슬퍼하길 바래. 너도 똑같이 상처 받아서 나의 감정을 느끼길 바래. 너 때문에 내가 죽는 거니까 똑바로 지금을 기억하길 바래. 등등. 대략 이런 말들이었고 전화와 메시지는 이틀 넘게 나에게 쏟아졌다.


나는 그때 잘 몰랐다. 내가 상처 받고 있는 줄. 내 애매한 태도 때문에 명지가 상처 받았고, 명지의 이런 행동은 상처로 인한 것이니 당연한 건줄 알았다. 아마도 그녀도 똑같은 생각이었겠지.


명지가 약을 먹기 때문에 나에게 저런 비상식적인 행동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반대로 명지는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약을 복용했고, 본인의 상처를 감당하지 못해서 쉽게 무너졌고, 그녀가 무너질 때 마침 내가 옆에 있어서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명지의 행동을 옹호해줄 마음은 없다. 단지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약을 복용하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결국 난 명지와 관계를 끊었다. 2년 후에 명지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하다고. 2년 후에라도 메시지를 보내서 고맙지만, 2년 전에 나는 혼자서 그걸 감당하기 조금 벅찼었다.





아영


아영(가명)과의 연애는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었다. 어쩐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 너무 많았다. 이상한 것에 집착하고 질투가 너무 많았고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하는 말을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이 하는 말도 기억하지 못했다. 해명했던 일은 다음번에 잊어버렸고, 이미 이해한 상황은 다음에 또다시 해명이 필요했다.


결국 헤어지자고 했다.


아영은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는 카페에서 테이블에 머리를 수차례 박았다. 쾅쾅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와서는 신호등을 기다리는 중에 도로로 뛰어드는 모션을 취했다. 붙잡았고 하지 말라고 했다.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상태로 연애에 돌입했기 때문일까. 모두 내 잘못 같았다.


아무리 쉽게 연애에 돌입했어도 주변에 이런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다. 나는 자주 나를 탓했다.


결국 헤어졌다. 저런 일이 있고 나서 사실 그 이후에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연애한 기간보다 헤어지는 기간이 더 길었다. 아영도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병이 더 깊어지지 않았으리라. 아니,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마주할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줄다리기 속에서 계속 나를 보호하거나 다치게 했다.




재밌는 건 둘 다 페미니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명지와 아영의 가해 행위에서 젠더 위계 관계는 분명 없을 테지만, 그 둘이 나에게 상처를 준 건 확실하다. 그런데 둘 다 당시에는 본인의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명지는 2년 후에 나에게 사과를 했지만, 아영은 끝내 하지 못할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둘 다 잘 지내길 바란다. 나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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