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남겨놓은 고고학적 유적, 유물들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인류가 만들고 운영해 온 국가라는 시스템 등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은 부지불식간에 권력의 역사를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말한다.
"권력은 인간 역사에서 필연적인 것(당연한 욕망)이라 생각합니다."
오사카 평야에 조성, 정비된 다이센 고분(5세기경. 총길이 486m. 이집트 피라미드이나 진시황 능보다 크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어 있으며, 거대 권력(천황권)의 출현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한 사회의 '권력' 여하가 끼친 영향은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출신이나 지위, 계급을 이용해, 사회 정치적 힘이나 경제력, 또는 지식이나 정보 등을 점유해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움직이려 해 온 것이 바로 '권력'이다. 역사 개설서 속에 ‘권력’이란 테마가 빠지지 않고 상주해 온 것은, 뿌리 깊은 권력지향성이 아직 인간사회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일본 역사에는 전근대 시대를 통틀어 개별적이고 독보적인 씨족에 의한 권력적 행보가 만연하였다. 일본이라는 국가 초창기 시절부터 그러했다. 소가씨(蘇我氏), 후지와라 씨(藤原氏), 다이라 씨(平氏), 그 분파인 호조 씨(北条氏), 미나모토 씨(源氏), 그 분파인 아시카가 씨(足利氏), 도쿠가와 씨(徳川氏) 등등.
그들 권력자의 행보를 주된 소재 삼아 사료는 기록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을 '주인공'삼아 오늘날의 역사책이 서술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권력의 역사'가 각인되어온 소이(所以)이다.
무엇보다도 일본 역사에 있어 한 씨족의 독점적 지위 형성과 유지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다름 아닌 천황가였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현 대신(現大臣) 및 양가(良家)의 아들 또는 손자는, 삼세(三世, 천황의 증손) 이하의 여왕(女王)을 취하는 것을 허락한다. 특히 후지와라 씨는 대대로 집정(執政)의 공에 의해 2세(二世) 여왕(천황의 손녀)을 취하는 것도 허락한다”(<일본기략>793년 9월 10일 간무(桓武) 천황 조(詔))
이처럼 일본 특정 씨족의 성공에는 ‘준황족적(准皇族的)’ 대우를 받는, 이른바 왕권 밀착형 권력으로서의 특성이 작용하였다.
대부분의 고대 귀족이 몰락한 9세기 말 이후로도 후지와라 씨는 천황가의 모계 친족으로서, 부계의 친족 겐지(源氏)와 더불어 태정관(太政官)을 구성하게 되는 권력의 중추로 존재하였다.
이렇듯 천황가와 밀착된 형태의 특정 씨족이 정권의 수뇌부를 독점하고, 대를 이어 그 권력적 위치를 계승하는 모습은 고대 이후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본 역사 전개상의 하나의 관습이 되어 버렸다.
권력 독점자의 정당성, 정통성 확보의 수단으로써 일본의 천황가는 소멸되지 않고 존속시켜져 왔다는 것이다.
이런 ‘권력의 역사’를 피할 길 없이 들여다보다가,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권력은 인간 삶의 외형적, 물질적 측면뿐만 아니라, 시대인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예컨대 <오카가미(大鏡)>(헤이안 후기 성립. 850-1025년 사이의 역사 이야기) 에는 당대의 권력자들에 대한 온갖 ‘세간의 소문’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대인의 심정, 평가가 엿보인다.
후지와라 씨를 중심으로 하는 정권 싸움에 대한 원망과 불화의 소문들이 무성하고(2-30,3-25,26,46,48,4-16,31,5-22), 그들의 재산 욕(3-44), 잔인하고 냉혹한 성격(3-45,46,4-32), 불순하고 오만함(3-49,4-1,33) 등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시선들을 이리저리 보게 된다.
“이처럼 모두 (후지와라 후히토가 세운) 야마시나 데라(山階寺)가 중심이므로, 이 절은 장엄하고 존귀한 곳입니다. 말도 안 되는 도리에 어긋난 일이 있어도 이 야마시나 데라(山階寺)에 관한 일이 되면 누구 한 사람 뭐라고 비판 등은 하지 않고, ‘그것은 야마시나 도리(山階道理)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별 격(別格)의 취급을 해서 통할 정도입니다. ……”(5-26)
급기야는 ‘야마시나 도리(山階道理)’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도리에 어긋난 일’도 비판할 수 없는, ‘별 격(別格)’을 만들어낸 후지와라 씨의 영화를 풍자하는 용어도 당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소문 좋아하는 쿄 와란베(京童);<伴大納言絵詞>出光美術館 소장
수도 교토의 온갖 소문에 자세하여 ‘유수 부식(놀고먹는)의 무리들(遊手浮食の輩)'이라 불리었다.
그러한 '권력의 역사' 이면(裏面)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독보적인 권력의 탄생과 유지에는 피비린내 나는 수많은 경쟁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권력 독점 현상은, 여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몰락을 자양분으로 한것이었다는 점, 역사의 '기억'은 이에방점을 찍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 역사에 있어 후지와라 씨 등으로 기인한 수많은 정쟁들은, 패배한 정적(政敵)이 ‘원한’으로 ‘보복’과 ‘저주’를 내린다는 관념을 사회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리하여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806-903); 헤이안전기의 공경(公卿)이자 학자, 문인. 후지와라 도키히라(藤原時平)의 중상으로 다자이후로 좌천되었다가 사망) 같이 '보복을 자행한다'라고 생각되는 존재를 ‘천신(天神)’으로 받드는 사상도 탄생하였다.
『日本紀略』에 의하면 황태자 야스아키라 신노(保明親王)가 죽은 것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스가 다자이후 장관(菅帥) 영혼의 숙분(宿忿)에 의한 소행이다"(延喜23(923)년3月21日)라고 하자, 조정은 미치자네를 "본관인 우대신에 복위시키고 정2위로 추증(追贈)하였다"(동 4월 20일)).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에게 '학문의 신' '수험(受験)의 신'으로 추앙받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그 원형이 '보복의 신'이다.
이렇듯 저주를 내리고 사람을 병사시킨다고 생각되는 존재를 ‘천신’이라고까지 부르며 받든 것은, 그 위력에 대한 공포, 인간사회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사실상 정쟁에 휘말려 죽는 사람들이 많았고, 자연재해나 역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았던 사회 속에서, 죽음이나 병마의 강도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고 버거웠던 심경이 빚어낸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희생자들을 만들며 자신들만의 독점적 이권을 확보해 간 권력, 권력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이러한 ‘천신’을 탄생시키고, 숭배하며 모시기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기타노 텐만궁 사두(北野天満宮社頭) 고에즈(古絵図, 무로마치(室町) 말기 제작;北野天満宮 소장)
기타노 사(北野社)는 903년 다자이후(大宰府)에서 죽은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의 원령을 진정시키기 위해 947년 건립
학업 성취를 기원하는 에마(絵馬, 부적) 속의 스가와라 미치자네
그밖에도 당 시대를 풍비했던 수많은 원령, 저주에 관한 이야기들( <오카가미>2-35,36.3-12,15,26,27,42)은, 권력 다툼의 패배자가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인식된 결과였다. 일본의 원령 사상은 음습한 권력 싸움의 참상이 빚어낸 인식이라 할 수 있다.
18세로 즉위했다가 퇴위한 레이제이인(冷泉院)의 정신병 증상(<일본기략>967년2월17일조)조차, ‘후지와라 모토가타의 원령에 의한 것’이라고 인식되었듯, 권력 싸움의 수라장에서 원령의 해악으로부터 천황의 존재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와 같이 일본 사회에는 특정 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싸움 속에서 각종의 음적이고 부정적인 관념들이 성장하였다.
이렇듯 저주, 복수 관념의 일상화 속에서 당시의 모든 자연환경적 현상 - 자연재해나 역병과 같은 병들도 모두 ‘저주’적 현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주 의식, 보복 관념이란 자신의 욕망(또는 한) 달성을 위해 상대를 해하고자 하는 생각이며, 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일본에서 성행했던 불교도, 여타의 어느 종교도 일본 사회의 정신적 구제책으로 역할하지 못하였다.
일본 사회의 모순적이고 부정적인 사회 관념을 만들어 낸 핵심에, 권력 독점의 문제가 있었다. 또한 그와 연관된 천황제가 있었다. 권력자 집안 또는 천황가와 같이 독보적이고 우월적인 권력이 공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사적으로 운용되었을 때 발생되는 사회 정신적 폐해 상황을, 일본의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