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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an 15. 2021

마음이 현명하고 깨침이 있으면

<곤쟈크 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 8>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그 안에 흐르는 메시지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닿기 때문일 것이다.

         

<곤쟈크 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27-31 미요시 기요유키(三善清行;847-918, 헤이안 초기 한학자. 문장 박사(文章博士) 겸 대학료(大学寮) 수석) 재상이 집을 옮긴 이야기 

    

지금으로 보자면 옛날에, 재상(宰相) 미요시 기요유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고귀한 사람으로, 음양도(陰陽道)도 극히 뛰어났습니다.     

......그 무렵, 5조 대로(五条大路) 호리카와(堀川) 근처에 황폐한 옛 집이 있었습니다.

“안 좋은 것이 사는 집이다”라고 해서,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았습니다.

집이 없던 재상은, 이 집을 사서 길일을 택해 이사하기로 했습니다.

“일부러 안 좋은 것이 산다는 집을 택하다니,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친족들이 그리 말렸지만 재상은 받아들이지 않고, (음력) 9월 하순 경에 길일을 택해 옮기기로 했습니다.     

단지 보통의 이사와는 달리, 유시(酉時;오후 6시) 무렵, 종자에게 다다미 한 장만을 들게 하고 우차를 타고 그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에는 5칸(약 9미터)의 침전(寝殿)이 있었습니다.

……

재상은 널마루를 청소시킨 뒤, 가져온 다다미를 깔고, 불을 피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다미의 남향으로 앉으며, ……잡색(雑色), 우사(牛飼) 등의 하인들에게 “내일 아침 오너라”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

한밤중이 되자, 천장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올려다보니, 천장 조각 틈새 하나하나에 얼굴이 보입니다. 다 다른 얼굴들입니다.

재상은 그것을 보고도 소란을 떨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얼굴들이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 남쪽 차양의 널마루에서 한 자(약 30센티미터) 정도의 사람 4,50명이 말을 타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갔습니다. 재상은 그것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벽장문이 열리며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앉은키가 석 자(약 90센티미터) 정도로, 편백 색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어깨까지 닿는 모습은 매우 고상하고 맑아 보였습니다.

……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려 이마만 희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이마의 모습도, 부채의 그늘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눈도 이상한 느낌으로, 신경 쓰일 정도로 기품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코와 입 등은 부채로 가려져 있었지만, 아무래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짐작되었습니다.     

재상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여자는 돌아가려고 부채를 걷어냈습니다.

보니, 코는 빨갛고 높고, 입가에 네댓 치(약 12~14센티미터) 정도의 은빛 송곳니가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기괴한 놈이다” 생각하며 바라보자니, 벽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재상은 이때에도 놀라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새벽달이 밝게 비췄습니다.

어슴푸레한 뜰의 나무 그늘 사이로, 옅은 청색 옷을 위아래로 입은 노인이, 편지를 들고 와서 엎드려 무릎을 꿇었습니다.

재상이 물었습니다. “뭔가 할 말이 있으면 해라.”

노인은 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몇 해 전부터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곳에서 살려고 합니다. 매우 난처해서 그것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재상이 말했습니다. “너는 근심하는 듯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사람이 집을 갖는다는 것은 합당한 절차를 거쳐서 하는 일이다. 하지만 너는 그런 사람들의 절차를 무시하고, 남을 협박해서 살지 못하게 하고, 집을 점거하고 있다. 정말 무도한 짓이다. 귀신은 도를 알고 그것을 굽히지 않기에 무서운 것이다. 너는 반드시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다. 너는 귀신이 아니라 늙은 여우일 것이다. 매 쫓는 개 한 마리 있으면 확 물어 죽일 판이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노인이 말했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옛날부터 살던 집이기에 그것을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남을 위협한 것은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말 안 듣고 한 짓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살 곳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빈틈이 없어 갈 곳은 없지만, 대학의 남문 동쪽에 공터가 있습니다. 그 땅을 허락해 주시면 옮기고 싶은데 어떠신지요?”     

재상이 대답했습니다. “매우 좋은 생각이다. 신속하게 일족을 거느리고 옮기는 것이 좋겠다.”

노인이 큰 소리로 대답하자, 이에 맞춰 4,50명이 대답했습니다.

     

날이 밝자, 재상의 집안사람들이 왔습니다.

재상은 이 집을 개축한 뒤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서운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현명하고 깨침이 있는 사람에게는, 귀신일지라도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사려가 얕고 어리석은 사람이 귀신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일전에 일본 TV를 보다 보니, 어떤 사람이 집을 구하다 생각보다 싼 집이 나와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이전 거주자가 이 집에서 불의의 죽음을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일이 처리된 지 시간이 흘렀지만, 죽은 사람의 혼령 이야기가 떠돌고, 사람들이 꺼림칙하게 여겨 집값이 낮아진 경우였다.

오늘날을 살아간다는 사람들도, 이렇듯 뭔지 모를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며 피하려고 한다.       


천 여년 전을 살았던 미요시 기요유키는 어째서 이렇듯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을까?     


낡고 귀신이 나타난다는 집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거기에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 무서움 때문에.

그리고 그 집은 영원히 그의 것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미요시 기요유키는 음양도에 해박한 사람이었다.

즉 귀신에 대해 공부하여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귀신을 ‘알고’ 있기에, 그는 두려워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무리를 해서 위압적으로 퇴치하려 하거나, 부딪치며 갈등하지도, 충돌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논리적인 설명으로 귀신을 제압시켰다. 

귀신들은 스스로 집을 떠났고, 그는 그가 원하던 집을 얻었다.     


미요시 기요유키는 ‘아는’ 자였다.

상대를 알고, 그에 맞는 바른 처신을 하였다. 그 결과 그가 바라던 것을 이루었다.          

 

                                              



취업을 앞둔 학생들이, 꼼꼼히 사회와 세상에 대해 알기도 전에 불안해하고 힘겨워하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에 대해 살펴보기도 전에, 남들은 어딜 가나 신경을 쓴다.

그 마음 때문에, 자신의 역량과 가능성에 도전하고 노력하는 희망을 키우기보다는, 부정적인 정보들에 압도되어 애초에 포기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어디 학생들만 그러하겠는가. 


우리는 한 치 앞을 ‘잘 모르기 때문’에 걱정을 하고 산다. 

‘잘 모르기 때문에’ 살아보지 않는 날들, 가보지 않는 길에 미리 불안스런 힘든 마음을 쌓아간다.       


걱정이나 불안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지난날 보고 들은, 혹은 직간접 경험의 부정적인 사진이 뇌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머릿속 사진이 그리 만드는 것이다.     


상대와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이에 맞는 바른 처신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운다면,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하며 시간낭비를 하지는 않을 듯싶다.     


‘마음이 현명하고 깨쳐’ 있으면, 귀신도 무서워할 바 아니라고, 천 여년 전의 미요시 기요유키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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