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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n 05. 2020

명분형의 한국, 현세 이익형의 일본

                      


 한국과 일본의 매스컴을 각각 보다 보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로 주장하는 요지가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다. 

상대가 왜 이것을 문제 삼는지 모르니까, 이해가 안 되니까 감정이 앞서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굉장히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감히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침 어제 읽은 책 속에서 유발 하라리 씨가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 유지를 편드는 것이다”(유발 하라리(전병근 옮김) <21세기를 위한 21가지의 제언-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하니까, 내 생각을 조금 말해보고자 한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추구하는, 중심으로 삼는 가치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이다. 


주지의 바와 같이 한국은, 비록 가치가 다양화되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그야말로 ‘절대화된 유교’ 사회의 틀을 물려받았다. 효를 중심으로 한 혈연중심의 논리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그 가운데 유교적 대의 명분론은 특히나 지식인들의 삶의 목적을 형성하리만큼 커다란 영향을 끼쳐온 부분이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경향성에 대한 평가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한국사람들은 명분을 중시하여 명분만 있다면 상당한 억지라도 그대로 밀고 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과거를 우물쭈물  넘기는 것을 못 견뎌하고, 정통성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 이단에 대한 차별이 강하다, 정치투쟁도 이데올로기에 관한 정통성 시비에서부터 시작한다”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차돈의 순교와 같은 과정을 거쳐 받아들인 불교에 대해서조차 배불(排佛) 정책이 일어나고, 유교를 국교화한 것처럼) 새로운 사조가 일어나면 또한 지난날의 전통도 쉽게 깨고 나간다”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이에 비해 그럼 일본은 어떠한가. 한국의 이러한 ‘명분’과 비견되는 일본 사회의 주된 이념은, ‘현세 이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일본 사회의 사훈(社訓) 속에서도 가장 많이 보이는 이념 ‘화(和)’가 바로 그러한 현세에 맞춘 실리형 이념인 것이다. 


역사상 쇼토쿠(聖徳) 태자는 일본 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和’의 정신을 만들어 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주장한 ‘和’라는 것도, ‘거슬림이 없는 것을 중시하는 것(헌법 17조의 제1조)’ 

 있는 그대로의 질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문제시하지 않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었다. 


특히나 이러한 ‘화’의 정신이 ‘일본정신’의 지주로서 주장된 것은, 일본이 갖은 세계전쟁을 도발하던 1930년대 중반부터 40년대였다. 국가의 전체성, ‘억조일심(億兆一心)’의 윤리로 이 같은 ‘화’의 이념이 활용된 것이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쇼토쿠 태자와 관련하여 ‘화’라는 말이 국정교과서 <초등과국사(初等科国史)>책에 기술되기에 이르렀다. 전후(戰後)에는 천황 중심의 질서를 ‘평화’의 길로서 옹호하며 내세우는 일본 사회의 심볼어로 ‘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      


즉 일본인이 천년 이상의 세월 속에서 건져낸 그들의 표징어 ‘화’란, 현실에 불만을 가지지 말고, 그것이 어떠한 차별 구조라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중시한다는 이념이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일본에는 '(역성)혁명'이 없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이유도 그러한 정신이 근저에 흐르기 때문이라 보인다. 

이는 대의 명분의 기개를 높게 평가해 온 한반도인의 이념세계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자면 일본은 그 최초의 시기에, 선래의 주민(죠몽 문화 주도자들), 후래의 주민(야요이 문화 주도자들 등), 그리고 그 뒤 한반도 정세에 따른 신라통일전쟁 이후의 유입 민, 중국계 유입 민 등 각종의 혼재 속에 세워진 나라였다. 유교, 불교, 도교 등과 같은 사상, 종교들도 더불어 들어왔다. 그 속에서 일본 열도의 정착민들이 택한 길은. 그 어느 한쪽으로 적극 동화되거나, 또는 적극 투쟁하는 않는 ‘화’의 방식이었다. 모두가 용인되고, 또 타협되는 분위기가 중시되었다. 

일본의 원시 가미(神) 사상은, 교의나 계율의 경전과 같이 설득적이거나 자기주장의 합리적인 바탕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 구체적 실체가 없는 추상성 때문에 여타 종교와의 혼합도 자유로웠고 문제시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본 사회에서는 어느 한쪽 방향으로의 본격적인 명분(이념)은 발달되지 못하였고, 단지 ‘영험’이 있는가 없는가의 현세 이익적 가치에 따라 평가되었다. 기복적 성격이 강하고, 실리적 경향성이 가장 중요시 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일본인들도 말하는, 이른바 ‘좋은 점만 취하기(이이토코 토리;いいとこ取り)’ 정신의 발달이다.      

 

따라서

 “철학적인 불교가 유입되었어도 일반 일본인의 사유 방법을 변화시키는 일은 쉽게 달성되지 않았다”, 

“에도시대에 주자학이나 양명학의 연구가 성행했지만, 일본의 유학자는 형이상학적인 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中村元),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의 구별조차 몰랐다”(貝原益軒),

 “(天의) 관념을 추상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荻生徂徠)와 같은, 

일본 지식인들 스스로의 지적이 나올 정도이다. 

즉 역사상 일본인들은, 새로운 사상을 들여 왔어도 주로 외피(형식) 위주의 유입이었지, 이념적 모색이나, 정신적 고민과 재창조로 연결하지는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일본문화는 외래의 것이 들어오면 형식적 면에서의 유입과 혼용은 용이하게 이루어졌으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본인 사유의 특질이 오랫동안 변모되지 않았다. 자고로 일본인의 사유방식에서 ‘현세 이익’ 이상의 가치가 구체적으로 모색되거나 보급된 적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유입된 제도, 문물을 수용하기에 바빴던 일본인들은 새로운 독창성이나 창조보다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을 조화시키고, 공존시키고자 하는 현세 실리주의적 의식이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일본인들은 흔히 자연스럽게 ‘1억 2천만 명의 신도 신자’이며 동시에 ‘1억 2천만 명의 불교도’ 임을 말한다. 고대 이후로 승복을 입고 축부(蓄富) 활동을 하는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든지, 중세 이후로 유덕자(有德者)=유전자(有錢者, 즉 돈 있는 자) 등과 같은 개념을 파생시킨 현상 등은 모두, 현세 이익형 이념을 제1의 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역사 속에서 해명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일본 정부는 “돈을 주었으면 됐지”하는 것은 그들이 가치롭게 여기는 현세 이익적 의식에 의한 태도인 것이며, 한국 정부가 “제대로 사과해야지” 하는 것은 명분을 중요하게 여겨온 역사적 분위기 속에서의 발언인 것이다. 

이러한 가치 양립의 상황에 대해 우선 근본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야 다음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해야 효율적이며, 그 결과가 있게 할 수 있을 것인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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