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리 Jun 05. 2020

천황(天皇, 덴노)이 있는 나라

                             

 2019년 4월 30일 아키히토 천황이 양위(讓位)를 하였다. 1933년생인 그는 1989년 1월에 즉위하여 새로운 연호(年號) 헤이세이(平成) 시대를 시작했다. 일본은 아직도 연호제를 사용한다. 모든 공식문서에 연호를 표기한다. 

나도 일본에서 살 때, 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출하는 모든 서류에 서력이 아닌, 연호를 써야만 했다. 내가 쇼와(昭和;1926-89년) 몇 년에 태어나서 쇼와 몇 년에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졸업했는지 등, 이것을 일일이 계산해서 바꿔 쓰느라 골치가 아팠다. 일본인들은 자기들끼리 "같은 쇼와 년대 생, 운운"하며 동질감 비슷한 것으로 묶어 버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더러 보기도 하였다. 


 연호제란 기본적으로 시간의 주인이 천황이라는 의식을 밑바탕으로 한다. 천황의 치세 속에 산다는 것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 부지불식 중에 심어주게 된다. 천황제의 존재와 연동하는 것이 연호제인 것이다. 

일본에서 천황제를 없애야 한다, 아니다 나름 논의하는 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한다. 하지만 일본의 천황제는 그렇게 쉽게 없어질 것이 아님은 짐작 가능하다. 현재 일본인들의 삶 속에 천황제의 유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흔히 영국의 왕실은 매스컴의 보도 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는 훨씬 더 그 의미가 무겁다. 역사적 시간과 더불어 아직도 일본인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 이념 속에 천황제는 우뚝 건재한다.      


 ‘천황’이란 본디 중국 율령이 규정한 호칭이다.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 부르는 ‘천자(天子)’나, 대외관계 속에서 지칭하는 ‘황제(皇帝)’라는 용어와 같은 표현이다. 특히 ‘천황’이란 신하에게 내리는 조서(詔書)에서 지칭하는 용어였다(公式令). 율령 법을 수입하면서 이 칭호를 일본이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천황이라는 용어 사용 등을 둘러싸고, "고대의 일본은 소제국(小帝國, 石母田正 등) 국가"였네, 하면서 일본 사학계에서 제법 활발한 논의가 벌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사학계나 매스컴에서는 천황을 ‘일왕(日王)’이라 고쳐 부르며 민감히 반응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이는 율령제의 수입과정에서 일어난, 용어 채용 현상의 하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황제가 지닌 원 뜻과는 다른, 그냥 일본식의 ‘덴노(天皇)’일뿐이다. 거리상 중국과 소원한 위치 속에서 책봉 체재에 편입되지 않았던 시기의 일본은, 동아시아 각국의 관계와는 이탈되어 ‘덴노(天皇)’이라는 용어를 자의적으로 사용하였다. 한자 차용으로 ‘天皇(덴노)’이라고 쓰고 있지만, 고유 일본어의 훈(訓)으로는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みこと)’(<고사기><일본서기>등)라 불리었다. 


 천황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기 이전에는 ‘오키미(大君, 大王)’라 불렸던 기록이 있다. 중국의 <후한서> 동이전에는 ‘왜노국왕(倭奴國王)’, ‘왜국왕 스승(帥升)’, <위지> 왜인전에는 ‘사마태국(邪馬台國) 여왕 비미호(卑弥呼)’, <송서> 왜국전에는 ‘왜 5 왕(倭五王)’, 그리고 <삼국사기> 등에는 ‘왜왕(倭王)’ 등과 같은 칭호가 보인다. 즉 ‘오키미(大君, 大王)’인 것이다. 


천황(天皇 덴노)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일본이라는 국명이 등장하기 시작한, 약 7세기 후반 경의 천무(天武) 천황 시절부터로 추정된다. 6세기 후반 나라(奈良) 현을 중심으로 하는 야마토(大和) 정권이 탄생하고, 672년 임신(壬申)의 난을 거쳐 정권을 잡은 천무 천황은 이른바 율령에 근거한 황족 중심의 정치체계를 수립하고자 한 것으로 유명하다. 율령에 근거해 자신을 천황으로 칭하고, 황후와 황태자 제도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712년 완성의 <고사기>와, 720년 완성의 <일본서기>에는 히노 가미(日神, 태양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자손으로서 천황가의 제1대부터의 계보가 만들어져 기록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당화되고 있다. 


 일본의 역사를 통해 천황이 실제 어느 정도의 통치력을 가지고 군림하였는가 살펴보면, 사실상 이는 회의적이다. 고대 시기만 하더라도 유력 씨족들에 의해 정권이 주도되어 천황이 정치의 표면에 등장하는 예는 아주 적었다. 환무(桓武) 천황과 같이 수도를 교토(京都)로 옮기고 북방의 에미시 정벌 등의 사업을 벌였던 등과 같은 예를 제외하면― 3분의 1 정도의 시기가 여성천황이기도 하였지만― 사실상 강력한 왕권을 발휘했던 흔적은 미비하다.

 

중세, 근세에는 주지의 바와 같이 사무라이의 무가 정권이 주도하는 막부시대였다. 그러나 막부의 수장인 장군은, 천황으로부터 정이 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는 직함을 공식 승인 받음으로써 막부의 장군직을 계승할 수 있었다. 그것은 먼저, 애초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 자신이 황족 출신이었던 것에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대대 장군가로서 계승할 수 있었던 명분은, 그 집안이 황족의 피라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공가(公家, 귀족)의 최고직인 섭관(攝關)까지 올라갔고, 쥬랴쿠다이(聚楽第)의 호화주택을 짓고 천황을 초대하여 친분을 과시하며, 천황으로부터 일본 전체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다고 호언하였지만, 새로운 막부를 열지는 못하였다. 그는 황족 출신이 아닌 미비한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천황으로부터 정이 대장군으로 임명받는 것으로 시작했던 에도 막부도,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의 법령을 만들어 천황가를 강하게 통제하고 감시하였다.  


즉 700년간의 사무라이 시대, 군웅할거, 약육강식의 무가 시대에 있어서도, 그 무가의 우두머리가 그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써 천황의 존재를 이용하여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그런 연유로 인해 천황제는 실권과 관계없이 무가 정권 시대에도 없어지지 않고 존립할 수가 있었다. 권력자와 권위자의 이분화(二分化)가, 천황제의 장기 지속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18세기 말에는 서양 외래에 대응해 일본 고래의 정신을 찾겠다는 국학운동으로 존왕(尊王)사상이 대두하였다. 천황은 일본 국가 체제의 독자성, 우수성을 상징한다는 관념을 형성시켰다. 이 주장이 막부 말기의 존황토막(尊皇討幕) 운동으로,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진다. 유신정부는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내리고, 메이지 천황은 교토로부터 옮겨져 수도 도쿄에 자리 잡았다. 

 즉 일본 근대국가 통합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절대 천황제가 활용되었다. 메이지 헌법은 그 제1조에 '일본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내걸고, 제3조를 통해 ‘천황은 신성하므로 이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였다.   


 이후 천황 국체론(國體論, 천황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은 일본 군국주의 실현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맥아더의 연합군 사령부도 ‘일본 국민의 반발을 우려해’ 천황제 폐지를 이루어 내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국민통합의 상징’(헌법 1조)으로서, 상징 천황제로, 정치적 실권은 없으되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지금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권력의 하나인 매스컴, 일본의 매스컴이 이 천황가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 바이다.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지속적으로 천황가에 대한 호의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일요일 아침 8시, 눈을 뜨고 TV를 켜면 “오늘 아키시노텐카(秋篠殿下)는……”하면서 시작하는, 천황가의 일과를 비춰주는 공영방송을 계속 접하다 보면, 그 천황가가 아주 가깝게 내 삶 속에 있는 듯 한 착각이 들었던 것은 나만의 경험일까. 


 2019년에는 4월 29일 쇼와의 날(쇼와천황 탄생일)로부터 시작되는 골든위크 기간에, 아키히토 천황의 양위식과 새 천황의 즉위식을 겸하면서 일본 전국이 최장 10일간의 연휴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 현대판 초강력 천황 파워(power)의 현현(顕現)이다. 


국민주권의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는 일본이고, 그것은 덴노 헤이카(天皇陛下)가 계시므로"라는 동영상이 요즘도 일본 인터넷을 통해 활개를 친다. 일본 황족의 숫자가 줄고 있음이 염려스러워 민간에 출가해도 공주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친다, 뭐 그런 보도들이 올라온다. 일본은 아직도 권력자와 권위자의 지도층 이분화의 행보를 하며, 국민의 의식을 이리저리 끌고 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이는 일본인들의 의식은, 한층 더 깊게 그저 자국 중심적으로 매몰되어 가는 듯하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천황제 이상의 이념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들이 무엇을 향해 마음을 함께 모아 가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나은, 그 이상의 답을 찾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는,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라는 점에 좀 더 시야를 넓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공영의 이념이 일본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간간히 해보게 된다.

  


*그림은 천황이 생활하는 다이리 (内裏)의 정전(正殿)의 모습(<年中行事絵巻>)

매거진의 이전글 명분형의 한국, 현세 이익형의 일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