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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n 05. 2020

10대의 나라 일본

                             

 일본의 방송이나 잡지 등을 보면 가장 눈에 띄고 주목받는 듯 보이는 세대는 10대들이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 tv 광고에 유난히 서양인이 많이 등장한다는 느낌과 더불어 이들 10대의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살펴보자니, 이들 10대가 일본 역사 속의 제법 중요한 장면에도 등장한다. 

 1582년, 1척의 포르투갈 배에 10대의 일본 소년 4명이 몸을 싣고 있었다. 기독교 예수회(구교)를 포교하러 왔던 이탈리아인 사제 바리야니의 주선으로, 규슈(九州)의 기리시탄 다이묘(기독교 세례를 받은 大名)들이 파견하는 소년들이었다. 이들을 일본 역사에서는 ‘텐쇼노 견오시세츠(天正遣歐使節, 天正은 당시의 연호)’, 

일명 ‘천정의 견당사(遣唐史)’라 부른다.

  

당시  14세의 이토 만쇼, 나카우라 쥬리앙, 13세의 치지와 미게르, 12세의 하라 마르치노를 태운 배는 나가사키를 출발해 2년 6개월 만에 유럽에 도착,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 13세를 공식 알현하였다. 장차 일본에 돌아가서 기독교 포교자로 활동하기로 예정된 일력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590년, 이들이 8년 반 만에 돌아왔을 때 일본내의 사정은 달라져 있었다. 당시 정국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베테렌(선교사) 추방령을 내려 국내 포교활동은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1549년 프란시스코 사비엘에 의해 전해져 많은 신자를 모았다.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도 처음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등과의 무역 이익을 목적으로 포교를 묵인했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이 일본 봉건제 질서 유지에 위배되고. 다이묘가 교회에 영지를 기부하는 등의 상황이 일어나자 기독교 포교는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20대의 청년이 되어 돌아온 사절단 4명 가운데 1명은 그 뒤 개종하였다. 2명은 사제가 되었지만 병사하거나 마카오로 추방되었다. 나머지 1명만 신앙을 지키다가 1633년 체포되어 나가사키의 운젠타케(雲仙岳)에서 사카사즈리(逆さ吊り, 거꾸로 매달리는) 형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4명의 소년들의 인생이, 시절의 폭풍우 속에 휘감겨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최초로 로마를 본 일본 소년들’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AJB朝日ジュニアブック 日本の歴史>, 朝日新聞社).


 또 한 무리의  '역사 속 10대'는 소녀들이다.

1871년 메이지 정부는 미국과 유럽을 둘러보기 위해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에는 단장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를 비롯하여,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은 메이지 유신의 핵심 인물들이 참가하였다. 수행원 포함 총 106명으로, 미국과 유럽 등에서 공부할  유학생이 약 42명―화족(華族) 13명, 사족(士族) 24명, 여자 유학생 5명―이  함께 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예컨대 훗날 돌아와 쇼와(昭和) 천황 때 내대신(內大臣)이 되어 구미와 일본 정부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信顕)와 같은 인물도 들어 있다.

 

이 사절단 안의 여자 유학생 5명은 어린 소녀들이었다. 옛 사막파(佐幕派)나 막신(幕臣)의 딸들이다. 우에다 데이코(上田悌子) 16살, 요시마스 료코(吉益亮子) 14살, 야마카와 스테마츠(山川捨松) 11살, 나가이 시게코(永井繁子) 10살, 츠다 우메코(津田梅子) 6살. 

당초 이들의 ‘10년간의 유학’을 위해, 모든 경비(왕비 교통비, 학비, 생활비, 용돈 등)가 관비(官費)로 결정되었다. 일본의 ‘불평등 조약 개선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이 기대되면서이다. 이들 중 맨 위 2명은 건강상의 이유로 돌아왔지만, 나머지 3명은 미국인 가정에 인수되어 10년을 넘게 공부했다.     

 

6살 최연소였던 쓰다 우메코(津田梅子)는 돌아와서 1900년 여성 영어학교(女子英学塾, 현 쓰다쥬크대학)를 세워 근대적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야마카와 스테마츠는 참의 육군경(参議陸軍卿) 오야마 이와오(大山巖)의 부인이 되어 ‘로크메이칸(鹿鳴館) 외교’에 맹활약하였다. 

로크메이칸(鹿鳴館)은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서구와의 조약 개정 교섭을 위해 추진한 ‘구화(欧化) 정책’의 일환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적극적으로 구미의 풍속, 습관, 생활양식의 도입과 모방을 시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곳에서 정부 고관, 국내외의 인사를 초대하여 무도회가 열렸을 때, 서양인과의 사이에서 익숙한 영어를 구사하며 조약 개정 추진의 분위기에 윤활유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스테마츠는 미국 언론에 의해 1904년의 ‘러일 전쟁을 빨리 종결짓게 한 주인공’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혼란기, 전쟁 시절에 육군, 해군 등을 남편으로 삼고, 각종의 사회사업, 간호사업, 여성교육, 음악교육 등의 근대화에 활약하였다(佐藤信 등 편 <詳説日本史研究>).     
 

 아무튼 10대의 소년, 소녀들을 교육시켜 미래에 대비하는 설계를 추진해 온 역사가 일본에는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0대의 장기적 가능성을 예견하고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비춰 보려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다 보면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돌아보게 된다. 개별적 조기 유학의 붐이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10대 하면, ‘무서운 중학생들’과 대입고사에 절어 사는 고등학생들이 떠오른다. 


우리의 10대들을 위해 좀 더 많은 고민과 장기적 설계가 필요하다는 책임감이 느껴진다. 지금 중학교에서 실시하는 자유학기제(학년제)의 도입 등도 그러한 차원에서의 국가적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새시대에의 방향성에 맞추어 청소년 인성교육을 위한 ‘마음 빼기 명상’ 프로그램(2018년 교육부 인증)의 도입 등도 이루어졌다. 이미 유럽 등의 학교 명상 교육 프로그램이 활성화된 결과가 한국에서도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다각도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밖에도 자유학기(년) 제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학교 안에서는 '아직 고민 중'이라 한다. 학교 안의 선생님들 뿐만이 아니고, 우리 사회의 모든 기성세대가 머리를 맞대어야 할 중대 과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이니 말이다.                                                                                                                                                                                                                                                                                                                                                                                        (2019년 작성)   


  *여자 유학생들; 좌로부터 3번째가 쓰다우메. 4번째의 부인은 감독 역(사진은 쓰다쥬크 대학 소장, <아사히백과 歴史を読み直す>, 朝日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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