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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l 10. 2020

오키나와인 친구

(유학기1)

                          

 유학생활, 하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치넨(知念)이라는 오키나와인(沖縄人) 친구다. 

동경대 법학과를 다녔는데, 졸업하면 오키나와로 돌아가 오키나와를 위해 살 것이라고 했다. 일본을 ‘본토(本土)’라 부르며, 오키나와와 구별하고 있었다. 오키나와에서의 반(反) 미군기지 데모 등의 소식이 들려오면 만사 제치고 휙 다녀오곤 하였다. 

‘싯카리시타(しっかりした; 딱 부러진, 야무진)’타입으로, 오키나와인 남자 친구를 누나처럼 챙겼다. 오키나와에서는 남자는 한량처럼 살고, 여자가 강하며, 집안의 어른은 할머니라고 가르쳐 주었다.


  가끔 눈에 띄는 오키나와 사람은 외모에서도 차이가 났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에게 많은 가늘고 긴 형의 얼굴이 아니고, 둥근 네모 형에 가깝다. 쌍꺼풀에 눈썹도 짙고 무엇보다도 털-머리털이 많다. 나는 오키나와에는 직접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겠지만, 아무튼 내가 본 오키나와 사람은 전형적인 남방형이다.


 일본은 지금도 DNA가  두계통으로 나뉜다. 

하나는 일본 규슈 남부의 가고시마 지역 등과 같은 남쪽 지방, 그리고 북쪽의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사는 아이누와 같은 사람들이다. 규슈 남쪽 바다에 있는 오키나와도 이들 계통이다. 

이들은 일본이 대륙 하고 연결되어 있던 1만 년 전 이전에 들어온 사람들로 후기 구석기, 그리고 신석기 죠몽(縄文) 문화를 이루고 살았다. 중국 유강인(柳江人), 말레시아 계통 등과 닮아 있어 '남방해양 민족'설이 주장되고 있다. 혹은 최근의 DNA 분석을 통해  2만 년 전 시베리아부터 온 '매머드 헌터'설도 제기된 바 있다.

       

또 하나는 이른바 현재 일본의 ‘본토’ 형으로, 대륙 쪽에서 건너간 북방계 사람들의 후손이며, 벼농사 등의 야요이(弥生) 문화(bc3세기-3세기경)를 이루고 살았다. 청동기, 철기의 문명을 가지고 들어가 중심지를 차지하고, 일본 고대국가를 이루고 살았던 주축들이다.

 

다시 말해서 선주민이었던 죠몽계는 최남단과 최북단으로 젖혀지고, 후발 주민인 야요이계 사람들이 중앙을 차지해 일본의 중심을 이루고 살았던 셈이다. 이들 두 계통의 유전자가 잘 섞이지 않고 지금까지도 같은 ‘일본 국민’이지만 두계통의 사람들로 나뉜다는 것이다. 

가끔 동경 시내에서 전철을 타거나, 시타마치(下町) 동네들을 걷다 보면, 얼굴이 둥근 계통의 몸이 몹시 작은 할머니들이 눈에 띈다. 본래 죠몽계와 야요이계는 신장에서 10센티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일본 사학계의 입장을 들여다보면, 일본인의 선조가 죠몽인인가, 야요이인가, 어느 쪽으로 정리할 것인지, 또 교과서에 적어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인의 선조가 죠몽계라고 하면, 그 죠몽계는 현재 일본에서 최남단과 최북단의 주민 계통으로, 다시 말해 본토 세력에 의해 정복의 대상으로 밀려났던 사람들의 후손으로, ‘본토’ 입장에서 보면 역사상 인정해 주지도 않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선조라 할 것인가. 

자, 그래서 야요인들을 선조라고 한다면, 한반도계를 선조라고 하는 것과 결국 같은 이야기가 되며, 시기적으로 bc3세기밖에 안되니 일본인의 기원론을 이야기하기에 너무 약하다. 

죠몽계라고 하면, 적어도 후기 구석기 인골이 오키나와에서 발굴되니 1만 6천〜8천 년 정도까지 그 기원 시기를 올려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 학계는 이렇게 정리했다. “구석기인과 죠몽인의 고(古) 몽골로이드와 야요이인의 신(新) 몽골로이드가 혼혈을 반복함으로써 지금의 일본인이 되었다 ”라고. 지금도 일본 국민의 DNA가 둘로 나뉜다는 점에 대해서는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일본인의 마음이 둘로 나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심각성을 가지고 자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오키나와의 우수한 인재가 동경대학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서도, 오키나와가 일본 정부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치넨의 마음 하나 열지 못했으니 말이다. 


 오키나와는 류큐(琉球) 왕조 시절 1609년 사츠마 번(薩摩藩)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의 침공을 받아 강제로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당시 류큐는 동아시아와의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이루고 있었다. 류큐가 도요토미의 조선 출병 때 파견군의 요청을 거부하고, 이에야스가 류큐 왕을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던 것 등을 이유 삼아 류큐를 공격하고 지배하에 둔 다음, 그 류큐를 통해 중국 산물 수입 등의 이익을 취한 것이었다. 류큐는 생산고의 3분의 1을 막부에 바쳐야 하는 가혹한 수탈을 받았다.

 

1875년 메이지 정부에 의해 류큐왕국이 폐지되고, 1879년에 일본으로 복속되어 오키나와 현이 설치되었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전투장이 되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미국이 실질적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가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되었다. 


이후 미군 기지의 주둔으로 인해, 미군의 중학생 성폭행 사건 등, 오키나와 내의 각종 사회, 환경문제의 근원이 되어 있다. 


긴죠 미노루(金城実)씨와 같은 오키나와인 예술가는, “훌륭한 일본인이 된다면, 오키나와인도 일본인과 대등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며 일본군 지원병으로 나갔다가 죽은 아버지는 “이누지니(犬死, 개죽음)였다”라고 이야기한다. 또 미군에 의해 교통사고로 죽었음에도 제대로 후속조치를 못 받은 제자를 안타까워하며, ‘오키나와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를’, 그리고 ‘오키나와의 독립’을 애타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또 한쪽에서는 아이누 출신의 젊은 여성이, 그의 일본인 연인이 "(아이누와 결혼하면) 호적에서 빼버리겠다"는 부모의 강경한 태도에 부딪혔다는 이야기를 하며, "취직에서는 물론이고, 결혼에까지 차별을 받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라고 인터뷰하던 장면이 겹쳐 지나간다.


  일본에는 그 밖에도 피차별 부락민의 문제 등, 일본인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일본 국적 민’들의 역사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외모나 국적, 민족 등의 출신에 의해 차별하거나, 차별적 인식을 가지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 시대의 우리 누구 한 사람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상 등한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빈번히 출현하였던 이 '차별’의 문제는, 사실상 아직까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듯하다.      


*사진은 < 휀 벨츠가 주장한 두 종류의 일본인, 죠슈 타이프/사츠마 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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