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기2)
대학원 박사과정 4학년 때에는, 학교 수업도 없고 박사논문을 써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고마바(駒場)의 유학생 회관에서 살았다. 자고 일어나면 논문을 쓰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세월이었다.
고마바 유학생 회관 옆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이 사는 기숙사가 있었다. 식사시간만 되면 그 건물 통째로 카레 냄새가 진동하였다. 여기에 사는 인도 친구에게 물어보니까, 주로 매일 카레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쌀 사는 것을 보니까 이른바 안남미, 가늘고 길며 찰기가 없는 인디카(Indica, 장립종)를 사서 먹는 것이었다.
어느 해이던가, 일본에서 흉년이 들었던 때가 있었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이라 돈을 아낀다고 나도 가격이 싼 인디카 쌀을 사 먹어 보았다. 찰기가 없고 푸석거려 도무지 맛이 없고, 밥 먹어도 먹었다는 든든함이 부족했다. 인도 친구에게 너도 일본 쌀, 즉 자포니카(Japonica, 단립종)로 사 먹으라고 하니까 맛없어서 못 먹는단다.
쌀을 주식으로 한다 하더라도, 같은 아시아 속에서도 이렇듯 다르다.
우리나라는 어느 쪽이냐 하면 일본과 같다. 쌀문화, 즉 벼농사 문화는 청동기•철기의 야요이 시절에 일본 전국으로 퍼졌다. 죠몽 만기(晩期) 약 2천4백 년 전-2천5백 년 전, 한반도와 가까운 규슈지역의 후쿠오카현 이타즈케(板付) 유적, 사가현 나바타케(菜畑) 유적지 등이 수전 경작의 최초의 흔적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열도에서도 한반도와 같은 단립종이며, 메벼와 찰벼가 있고, 논두렁, 수로 등을 만들어 수전 경작을 하였다. 절구, 공이 등을 이용하고, 곡물을 찧어 도정하고, 나무로 만든 서까래, 쟁기 등의 도구를 사용했던 흔적 등, 한반도와 동일했던 모습이 확연하다.
다시 말해 단지 쌀만 전해서 심어 먹은 것이 아니라, 벼농사를 짓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직접적인 유입으로 인해, 동일한 농경문화가 일본 내에 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한반도 자체에서도 충북 청주 옥산면에서 발견된 소로리 볍씨가 약 1만 3천 년 전의 것으로 판명된 바 있다.
동탁에 새겨진 절구(兵庫県桜か丘 출토 5호 동탁에 새겨진 그림(神戸市立博物館 소장)
그런데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들여다보면
“벼의 기원은 인도의 아셈과 중국의 운남에 걸친 지역(약 4천 년 전〜약 5천 년 전)이라는 설과, 중국 장강(양자강) 하류지역(약 5천 년 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주로 이런 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한반도를 아예 기술하지 않는 책자도 간혹 보이고, 여러 설 가운데 한반도는 단지 경유지로 이야기하는 것이 많다. 이런 식이니, 일본인 어느 부인이 나에게 "한국에도 쌀을 먹나요?"와 같은 질문을 하였던 것이리라.
<아사히 백과> 도작 전파로(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의 직접 경로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동해 쪽, 일본에서는 일본해(본래 17세기 서유럽지도에서 사용되었던 명칭)라 부르는 해안 지역을 돌다 보면, 일본의 현청(縣廳)에서 관리하는 현 박물관들이 잘 정비되어 있다. 박물관 전시물 속에는, 지역도 지역이려니와, 고구려, 발해계의 토기나 유물들이 제법 눈에 띈다. 그런데 그 걸어놓은 설명서를 보면 시원지로서의 중국, 그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 이야기가 빠져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교과서나 박물관 설명서 등을 보게 되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예전에는 속상해하며, 욕을 하며 이런 것들을 보았지만, 지금은 해결할 방법에 대해 고심하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큰 소리,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력을 착실히 키워가는 노력과 행동이, 이러한 모습들을 실제 바꿔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