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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n 12. 2020

역병과  일본인


                            

 한 민족, 국민의 정서와 사유 세계, 관념, 관습의 형성에는 자연환경, 특히나 고생스러웠던 재해적 환경의 영향이 있었음을 이해해 볼 수 있다.


 고온다습하기 그지없는 일본의 여름날, 아침에 마시다 만 컵을 저녁에 와서 보면 안쪽 물표면에 까만 곰팡이가 피어 있어 얼마나 놀랐던가. 

목욕을 하고 환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느 틈엔가 벽과 천장은 곰팡이로 까맣게 얼룩이 졌다. 몇 번이나 그거 치우느라 고생 좀 하면서, 환기에 집착하게 되어버렸다. 

엄지손가락만한 바퀴벌레가 부엌 싱크대에 나타나 툭툭 이동하는 그 소리가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내가 집을 나와 밖을 빙빙 돌기도 하였다. 다다미방 관리에 서툴러 생겨난 벌레에 물려, 가려워 긁어대느라 피딱지 가득 찬 다리에 반바지 입고 다녔던 사연도 아련하다. 


 온갖 곰팡이 약, 벌레 약 사들고 들어가 뿌리고 뿌리대다 내가 약 기운에 취해 정신이 아득해졌던 경험 속에서, 인간이 자연환경을 ‘헤치고’ 사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아님을 어렴풋히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물며 해마다 몇 차례씩 어김없이 찾아오는 지진에 대한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을 자아내게 하였다. 

인간은 땅바닥을 딛고 살아야만 하는데, 그 땅바닥이 송두리째 흔들리는―그것도 예고도 없이, 생각보다 자주―환경 속에서 일본인들은 어떠한 심정으로 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어떠한 정신적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을까 궁금해 졌다. 

유학생인 나처럼 왔다 떠나가는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자손들의 삶의 지반이 이렇듯 유약하고 위험하기만 한데, 또 그 위험성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불가항력의 것인데, 과연 이 속에서 일생을 살아가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그러나 나는 일본인 지인들의 마음을 행여 다치게 하는 것은 않을까 싶어 끝내 직접 물어보지는 못하였다. 

다만 일본에 장기 거주하였던 어느 교수님의 다음과 같은 기술에 공감해 볼 뿐이다.


“가끔 집 밖을 나가다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찬찬히 연구실을 둘러보는 습관도 생겼다. 죽음을 가까이 느껴보는 것, 지진이라는 자연적 재해가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가 보다. 일본이라는 땅은 이만치 죽음과 친해질 만한 자연적 배경이 있다. 풍토에 의해 사상과 문화가 결정된다는 자연주의적 문화론의 관점은 적어도 일본에서는 정확히 맞는다.”(김응교 인문여행 에세이 <일본적 마음>)      


사료를 읽어가다 보면, 일본의 자연환경이 얼마나 일본인의 관념, 관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통감할 수 있다. 

고대 사료에서부터 넘쳐나는 온갖 지진, 홍수, 태풍, 가뭄 등의 기사들, 그리고 이 모든 자연재해적 현상은 인간 삶의 터전을 여지없이 파괴하고, 궁극적으로는 역병의 현상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역병 관련 기사는 일본 열도인들이 겪어왔을 강도 높은 고난들을 보여준다. 


이 역병에 대한 두려움 속에 무엇보다 강고해진 것이 일본인들의 신(神) 관념이었다. 

역병으로 인한 사망과 피해의 원인을 신의 뜻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 신에게 공경의 예를 다하는 것을 최고의 해결책이라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지속되어 근세 에도 시기까지도 절이나 신사의 부적(守札)을 배부하는 것이 역병에 대한 유일한 대책이었다. 


처음에 일본에 불교가 들어가게 된 과정에도, 역병을 ‘불신(佛神)’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작용하였다. 어디 이뿐이랴. 역병의 원인을 정치적 사건으로 죽은 권력자의 저주에 의한 것으로 보는 원령(怨靈) 신앙의 발달, 온갖 물괴(物怪, 모노노케) 현상을 신이나 조령(祖靈)의 저주로 해석하는 관념의 횡행, 험난한 현세보다는 막연한 극락정토에 가치를 두는 정토신앙의 성행, 갖가지 가지술(加持術)과 주험술(呪驗術)을 익힌 승려나 음양사의 득세 등과 같은 상황 속에서, 효험(영험) 제일주의 가치관이 시대정신의 주축을 이루어갔다. 어려운 형이상학적 이념이나 교리보다는, 삶의 현장 속의 당면 문제를 해결해 줄 실리적 가치가 우선시 되었다. 

 

원인을 알기 어려운 병마로 사람들이- 그 어떤 권력자도,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쓰러져 죽어가는 현상 앞에 무력화된 심성들은, 절대적 힘에 대한 깊은 공포와 두려움 속으로 함몰되었져 갔을 것이다. 

‘신의 저주’라는 관념은 이윽고 보복을 당연시하는 무가 시대의 정서로 맥을 이어갔다. 

전염 등에 의한 ‘게가레(穢, 더럽혀짐)’를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의식의 만연은, 피와 죽음 관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타 히닌 등의 피혁종사업자, 형벌 집행자, 청소역, 피차별부락민 등)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이어졌다. 

전염병을 옮겨올 수 있는 타인, 경계 밖의 지역, 외국에 대한 폐쇄적 정서 또한 이 속에서 함양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속에서 지금 일본인들의 철저한 위생관념, 청결함 중시의 방식도 나왔을 것이라는 점이 자연스레 납득이 간다. 지금도 일본에서 행해지는 기온마츠리를 비롯한 많은 마츠리들은 본디 역병을 가져 오는 신(역신)에 대해 행해졌던 것들이 풍습화 된 것이다.


이유가 있어 결과가 있는 것이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은, 그 환경 조건을 겪으며, 적응하며, 나름대로의 가치관, 사고방식, 관습을 형성해 온 것이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알고 나서는 나와 다른 방식의 삶의 모습을 하고 사는 이들을 이상하게 보거나 하는 태도를 바꿀 수 있었다. 

인류사의 모습을 깊고 크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림은 일본인들이 상상한 '역신(疫神)'(融通念仏縁起絵巻 クリーブランド美術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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