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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Dec 11. 2020

일본의 천년 도읍 쿄토 헤이안경은 이렇게 탄생했다

고대 최강의 왕권 <간무 천황>의 정신세계 

            

일본인이 자랑하는 천 년 세월의 고도(古都), 교토(京都) 헤이안 경(平安京;794- 1868)은 어떻게 탄생했나.

또 그 헤이안 경을 탄생시킨 주인공 간무(桓武;환무) 천황(재위;781-806년)은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인가. 


    

간무 천황


일본 역사 기술 속 표현은 ‘획기로서의 간무조(桓武朝)’이다.

 ‘헤이안(平安) 귀족사회가 형성됨과 더불어 천황의 변모’가 이야기되는 시기이다.  

   

우선 간무의 즉위 과정부터 살펴보면, 이게 그다지 순탄치 않다.

여성 천황이었던  쇼토쿠(称徳) 천황이 후사 없이 죽은 후, 황통은 텐지계(天智系)의 고닌(光仁;즉위 770-781)에게 넘어갔다. 이오우에 나이신노(井上内親王; 쇼무(聖武) 천황의 딸, 생모는 아가타노 이누카이 씨(県犬養氏) 황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오사베 신노(他戸親王)가 황태자가 되었다.      


772년 후지와라 모모카와(藤原百川)등의 정치적 책모로 텐무계(天武系)의 피가 섞인 황후와 황태자가 폐위되는 사건이 일어난다(사료는 원죄(冤罪) 일 가능성을 암시한다). 

황태자의 자리는 고닌(光仁)의 장남이었던 야마베 신노(山部親王)에게 돌아갔고, 그가 후일 간무 천황(재위 781-805년)이다. 간무의 생모는 백제 도래계인 다카노 니이가사였다(高野新笠; 백제 무녕왕의 아들 순타 태자의 후예, 귀화인 야마토 우지 아손(和氏朝臣)출신;<속일본기>790년정월15壬子조).


간무가 태자(太子)가 되는 과정도 녹녹한 것은 아니었다. 조정의 중신 후지와라노 하마나리(藤原浜成)가 ‘그(간무) 출자의 천함’을 지적하며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간무는 즉위 후, 반란을 일으킨 히가미노 가와쓰구(氷上川継)의 인척(장인)이라 하여 하마나리의 산기시쥬(参議侍従) 지위를 박탈해 버렸다. 

그리고 어머니 니이가사를 ‘황태후’로 하고, ‘아메노타카시라스 히노코 히메노미코토(天高知日之子姫尊)’의 시호를 올렸다(790년 정월). 니이가사의 조카 야마토노 아손 이에마로(和朝臣家麻呂)를 종 3위 주나곤(中納言)까지 승진시키는 등, 귀화인을 우대하였다.

     

간무는 즉위 다음 해 엔레키(延暦)로 개원한다(8월19일 詔勅). “요즘 재이(災異)가 빈번하고 요사한 징후가 더불어 출몰한다”(7월 29일) 등이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진, 기근, 역병 등의 수많은 재액(災厄) 기사들이 당시의 불온했던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그 속에서 이노누에 나이신노, 오사베 신노의 ‘원령(怨霊)에 의한 것'이라 생각되는 불상사들이 속출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간무는 교토의 나가오카 경(長岡京)으로의 천도를 발표한다. 그 이유로 "하천이 가깝고 교통 편의로 공부(貢賦; 세금)를 운반하기 용이하다"(詔勅)라고 하였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념적으로 가와치 구니(河内国) 가타노(交野)에서 천황이 행한 교천(郊天) 제사와 중대한 관계가 있다”(林陸朗 <長岡京の謎>), “중국 혁명 사상의 영향" (瀧川政次郎 <革命思想と長岡遷都>임을 이야기 한다. 이른바 ‘신왕조의 창시’였다는 말이다.     



<속일본기>를 들여다보면 간무는 유렵(遊猟)을 빙자해 이미 수도 없이 교토 지역(河内国 交野;백제왕 씨(百済王氏) 일족의 근거지)에 출입하고 있었다.     


783(延暦2)년 10월14일, 천황은 가타노(交野)에서 매를 사용해 유렵을 하고, 18일까지 체류, 그 사이 행궁(行宮;임시 거처지)으로 공봉(供奉)한 백제왕 씨(百済王氏) 일족에게 온상(恩賞). 

구다라지(백제사 百済寺)에 오우미(近江)・ 하리마(播磨) 양 지역의 정세(正税) 각 5천 속을 세입. 

백제왕 이선(百済王利善)에게 종 4위 하, 동 무경(武鏡)에게 정 5위 하, 동 원덕(元徳), 동 현경(玄鏡)에게 종 5위 하, 동 명신(明信)에게 정 4위 하,  동 진선(真善)에게 종 5위하를 내렸다.


가타노(交野)에서 유렵 하였을 때 후지와라 쓰구타다(継縄;백제왕 명신의 딸을 아내로 함)의 별장을 행궁(行宮)으로 하고, 쓰구타다는 백제왕 등을 이끌고 종종의 음악을 연주, 

백제왕 현경, 쓰구타다의 아들 다카토시(乙叡)에게 정 5위 하, 백제왕 원신(元信), 동 선정(善貞), 동 충신(忠信)에게 종 5위 하, 동 명본(明本)에게도 종 5위하를 내렸다(동 6년10월17일).      


이곳에서 (가타노 교천의 땅, 나가오카 경 남쪽) 아마츠 가미(天つ神)인 호천 상제(昊天上帝)에게 제를 올리고 더불어 아메노무네 다카츠가스 스메라미코토(天宗高紹天皇; 부친 고닌천황)에게 제를 올렸다(동 6년 11월4일).          



간무는 당당히 “백제왕(百済王)등은 짐의 외척이다”(延暦9(790)年2월甲午) 선언한다. 관위 사여를 아낌없이 행하였다. 

간무의 치세 연간  ‘짐의 외척’ 백제왕 씨에 대해 각별한 대우와 유착 관계를 과시하려 했던 면모가 두드러진다(延暦6(787)年10月丙申, 己亥, 동 10(791)年9月庚辰,10月丁酉, 己亥, <일본후기>延暦12(793)年5月戊子, 동 17(798)年正月壬申조 등).


이러한 간무의 행보 속에는 오히려, 외척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불안정한 왕권의 모습이 투영되어 나온다. 

결국 이러한 간무의 외척 의지 자세는,      


“그(아마토노 아손 이에마로)의 선조는 백제국 사람이다. 사람됨이 목눌(木訥)하고 재학(才學)이 없는데도 제(帝;간무)의 외척으로 특별히 발탁되어 승진했다. 번인(蕃人;외국인, 도래인)이 상부(相府)에 들어온 것은(재상이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일본후기>延暦23(804)年4月辛未, 和朝臣家麻呂 훙전)는 비아냥을 낳게 된다.     


그런 와중에 간무는     

“에치젠(越前), 단바(丹波), 다지마(但馬), 하리마(播磨), 미마사카(美作), 히젠(備前), 아와(阿波), 이요(伊予) 등의 구니(国)에 명하여, 헤이죠 궁(平城宮;710-784년의 수도) 제 문(諸門)을 부셔 옮겨 나가오카 궁(長岡宮)을 지었다.”(延暦10(791)年9月16甲戌)     


텐지(天智) 천황계의 간무는, “이제까지의 텐무(天武) 천황계 사람들과 인연을 끊기 위하여, 나라시대(710-784)의 정변, 승려의 정치 간섭 등의 반성으로부터 사원 세력과 떨어지는 것이 목적"으로 천도하고자 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리하여 "도다이지(東大寺)조차 이전을 허락하지 않고 헤이죠 경(平城京)에 내팽개쳤다.    


 그런데 이 나가오카 경(長岡京)으로의 이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책임자였던 후지와라 다네쓰구(藤原種継)가 암살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에 간무의 동생(당시 황태자)이었던 사와라 신노(早良親王)가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사실이 아니다"를 주장하며 음식을 끊었고, 귀양 가는 도중 사망하고 만다. 그 뒤 간무의 아들을 비롯하여 가까운 일가들이 연이어 사망하자, 이 모든 불행은 “사와라 신노의 타타리(저주)"라는 소문이 돌았다.


간무의 나머지 일생은 이 ‘사와라 신노의 저주’와의 싸움이었다. 간무의 정신세계를 어지럽게 한 사건들로 당시의 기록은 얼룩져 있다.     


794(延暦13)년, 간무는 다시 요도가와(淀川) 물줄기를 따라 더 상류의, 헤이안 경(平安京)으로 천도하게 된다. 가타노(交野)의 교천(郊天) 제사지로부터 북쪽에 해당하는 우다무라(宇太村)의 땅, 도래계 하타 씨(秦氏) 세력지였다.

헤이안 경은 ‘사신 상응(四神相応)’ 즉, 남 주작(朱雀), 북 현무(玄武), 동 청룡(青竜), 서 백호(白虎)의 요지로 선택된 땅이었으나, 이에 이르는 과정 속에 간무의 많은 정신적 고통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치세 년간 활발히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천하의 백성이 괴로워하는 것은 군사(軍事)와 도성 축조(造作)이다”(<일본후기>延暦24(805)年12月壬寅조)라 후지와라 오쓰구(藤原緒嗣)의 말에 따라 결국 이 모든 것을 중지하고 만다. 정계의 필두 세력 후지와라 오쓰구의 비판 앞에 천황의 사업은 무력하게 철회를 맞게 된 것이다.  

    

 간무는 일생동안, 그의 출자를 문제 삼는 구귀족들과, 천왕가의 죽은 영혼들(이노우에 나이신노, 오사베 신노, 사와라 신노의 원령)에게 시달렸다. 특히나 사와라 신노에 대한 공포심은 지대한 것이었다(<일본기략>延暦11(792)年6月10일, ‘스도 천황(祟道天皇)’으로 추존하는(동 6月17庚子조) 등). 


과도할 만큼의 반응을 보이던 간무는, “폭우 대풍으로 중원 서쪽 누각이 쓰러지고, 소가 이에 맞아 죽는 일이 생기자, 탄식하며 말하길 '짐에게 이롭지 않은 일이지 않을까'(그의 태어난 해가 축(丑))” 하고 우려하더니,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병들어 죽고 만다(<일본후기>804年8月壬子, 806年3月17일). 그는 죽음의 마지막 자리에서도 사와라 신노의 '저주'를 두려워하였다.     


고대국가 기간 중, 조도(造都)와 정이(征夷) 사업 등으로 그 어느 시기보다 강력한 왕권을 펼친 것으로 평가받는 간무. 

간무의 뒤를 이은 자손들이 그후 대대로 천황의 자리에 올랐으며, 무가의 수장 다이라씨(平氏), 미나모토씨(源氏;가마쿠라 막부를 창시), 아시카가씨(足利氏;무로마치 막부를 창시), 도쿠가와씨(徳川氏;에도 막부를 창시) 등도 모두 그의 자손으로부터 나왔다. 또한 오늘날의 천황가로 이어지고 있는 바이다.


일본 고대 국가 최강의 군주 간무는, 한편으로 이렇듯 외척에 의존하는 불안정성과, 원령에 괴롭힘을 당하는 허약한 정신세계의 모습을 역사의 기록 속에 남기고 있다. 위약했던 고대 왕위(王威)의 표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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