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 속 승려와 이념<곤쟈크모노가타리슈7>
고대 일본인들이 남긴 방대한 설화집 <곤쟈크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11-12세기경 성립), 그 가운데서 본조(本朝;일본) 편을 통해서는,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사회상, 그 속의 처세관, 정신세계 등이 들여다 보아진다.
오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눈에 띈다.
아미타 히지리(阿弥陀聖)이라는 법사(法師, 아미타 신앙을 권하며 각지를 수행하고 돌아다니는 승려)가 있었다. ……법사가 생각하길 “여기는 갑자기 어디서 사람이 오지 못하는 곳이다. 이 남자를 죽여서, 가지고 있는 물건과 입고 있는 의복을 모두 가진다고 해도 누가 알 리가 없다.”……법사는 본래 힘이 셌던 지라……갑자기 쇠 지팡이로 남자의 목을 눌러서……죽여버렸다.
……멀리 산을 건너 사람이 사는 마을에 이르러 “오늘 밤만 재워주십시오”청하였다. 주인 여자가 보니까 법사가 입고 있는 옷의 소매가, 남편이 입고 나갔던 의복의, 소매에 색 있는 가죽으로 기워놓은 것이 닮아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그 법사를 그 장소에 묶어서 사살(射殺)해 버렸다.
이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법사를 미워했다. “……법사의 몸으로 마음이 흉악해서 물건을 훔쳐 죽임을 당한 것은 하늘이 미워하셔서……실제 이렇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하였다.(29-9)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법사를 자의적으로 사살해 버리는 이 모습은, 국가의 치안력을 기대할 수 없었던 시절, 지역 향리의 사람들이 자치적인 검단력(檢斷力)을 발휘하며 생존하였던 당시 일본 사회의 실정을 보여준다.
더불어 당시 불교의 승려라는 신분에 대한 세간의 인식도 잘 드러나 보인다.
승려는 또 갖가지 애욕과 욕망의 존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기온(祇園)의 벳토(別当) 정액승(定額僧;관이 일정 수를 정해 급료를 지급하는 승려)이, 남의 유부녀(受領의 집)에 몰래 다니고 있었는데, 결국 기온의 승려들 앞에 들켜 창피를 당하고 도망 갔다는 이야기(28-11화)
어느 덴죠비토(殿上人;천황에게 알현 가능한 귀족) 집 여성(뇨보;女房)과 몰래 정을 통하던 명승(名僧)이, 여성의 실수로 사람들에게 들켜버린 이야기 (28-12),
승려 겐보(玄防)는 쇼무천황의 부인 고묘황후(光明皇后)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를 세간에서 비난한다"며 후지와라 히로츠구(藤原広継)가 난을 일으키다 죽는다. 그는 "악령(悪霊)이 되어 나타나......겐보를 붙잡고 하늘로 올라가 그 몸을 산산히 부셔 떨어 뜨리니, 그 제자들이 이를 주워 매장하였다"는 이야기(11-6),
여성 천황 고켄(孝謙)의 병을 치료하다 가까와진 승려 도쿄(道鏡)는, 최고위의 태정대신 선사(太政大臣禅師)에 이어 법왕(法王)이 되고, 차기 황위까지 넘보았지만, 결국 고켄이 죽은 뒤 좌천되었다는 이야기(<속일본기>765년10월2일, 766년 10월20일,770년 8월17,21일조 등).
<곤쟈크모노가타리슈>와 더불어 정사의 기록 속에도 승려의 욕망에 의한 행보가 자세하다. 그와 더불어 승려를 모욕하거나 비난하던 모습들이 동시대의 사료들을 통해 전해진다.
혹은 승려를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 벌을 받는다 라고 강조하고 있는 내용의 <일본영이기>설화들조차, 사실상 승려를 모욕하고 비난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정신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승려가 누구보다도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욕망 추구의 모습으로 비취졌던 것이다. 그 속에서 종교적 출가자에 대한 존경심이나 존재감은 위약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사회적 신뢰와 권위를 잃은 승려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먼저 승려를 비롯한 이른바 종교가들이 민중의 정신세계를 이끌어줄 수 있는 정신적 구도자로서의 힘이 미약했다는 점이다.
그것을 조롱하고 있는 설화들의 존재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사실상, 사람들은 승려, 즉 정신적 구도자들에 대해 특별한 기대감을 인식의 근저에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되는 점이다.
보통의 세속적 범인과는 다른 특별함, 그러면서도 자신은 이루지 못하나, 혹여 이루기를 원하는 이상(理想)의 구현을 대변해 주고, 정신적인 위로와 인도를 해 줄 것을 기대하는 소망감이 밑바닥에 있었던 것이리라.
그것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실망감이, 승려를 주된 소재로 다루면서도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가차 없이 쏟아내 붓고 있는 의식 속에 엉겨져 투영되어 나온다.
일본에서는 애초에 불교의 유입 자체가 황족이나 귀족 등의 특권적 이익을 옹호하는 역할에 충실하였다.
출가라는 행위 역시, 불교적 이념이나 교리를 이해해서라기보다는, 세속적 이익을 바라는 측면이 크게 작용하였다. 천황자리를 물려난 상황이나 귀족, 장군과 같은 권력자가 종교 세력을 또하나의 권력으로 등에 엎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출가하였다. 또 중하급 집안 출신자가 조정에서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루트의 하나이기도 하였고, 승복을 걸침으로써 국가의 세금 구조로부터 탈피하여 생계를 챙겨가는, 세속적 삶의 연장선에서 방편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렇듯 현세가 지난(至難)한 과제였을 삶 속에서 갈망된 것은 오히려 깊은 정신적인 위안처나 막연한 이념 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끝내 일본 사회에서는 불교가 이상적인 고도의 이념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고, 현실적 인간 삶의 도구의 하나로써 보편화되는데 머무르고 말았다. 역사시대에 있어 일본인들을 이끌고 갈 말한 초월적, 정신적 이념으로 작용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의 오랜 학업생활을 끝내고 일본을 떠나오면서, 일본 사회를 비춰 나갈 '빛'이 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 낙담하였던 기억이 난다. '뭔가 배울 것(이건 나의 취향상 특히 정신적인 것)이 있을 것'이라는 유학 당초의 생각이, 기대 만큼 충족되지 못하여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