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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l 21. 2020

‘여성’이 만든 역사, ‘여자의 마음’

(곤쟈크모노가타리슈5 )


일본에서는 ‘여성사’‘여성학’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활발하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아서인지, 현대 일본 여성들의 삶도 우리보다 '구속이 적은' 자유로움을 누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기록이 전하는 일본 열도 역사 속, 비중 있는 첫 인물이 ‘여성’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한(漢) 나라 영제(靈帝) 광화(光和, 178-184) 때 왜국(倭國)이 어지러웠다. 여러 해 동안 서로 싸웠다. 이에 히미코(비미호;卑彌呼)를 왕으로 공립 하였다.…… 지아비가 없고, 귀도에 능하여 사람들을 혹하게 하였다.……노비 천 명이 히미코의 수발을 들었다. 오직 한 남자 아우가 출입하며 비미호의 명령을 전했다.……”<삼국지 위지(魏志) 왜인전>    


왜국이 서로 나누어져 싸우며 어지러웠던 시절, 여타의 남성 수장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왕의 자리를 쟁취한 자는 여성 수장, 히미코였다. 중국의 기록에 의해 알려진 일본 열도 역사의 초창기 장면은 이렇듯 여성 왕의 존재에 대해 상세하다.     


그녀는 239년 위(魏)의 명제(明帝)에게 난승미(難升米) 등의 사절을 파견하여 금인(金印)의 '친위왜왕(親魏倭王)’ 칭호를 받는다. 


우리의 <삼국사기>에도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왜 여왕(倭女王) 비미호(卑弥呼), 사절을 보내 내빙(来聘)하였다.” (아달라 이사금20(173)5월)     


이 여성은 이렇듯 대외적으로도 적극적이고 대담한 행보를 펼쳐 보였다. 

그 후계자도 ‘여성’으로 이어진다.     

“히미코가 죽자 다시 남자 왕을 세웠다. 나라 안 사람들이 승복하지 못하고 다시 서로 죽이고 죽였다. 다시 히미코의 종녀(宗女)인 일여(壹與)를 왕으로 세웠다. "     


히미코는 죽은 뒤 “노비 약 100여 명을 순장”한 “직경 백 여보(歩)의 큰 무덤”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시대를 넘고 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다. 

일본 학계에서는 나라 분지(奈良盆地)의 하시하카 고분(箸墓古墳;최고급(最古級) 전장(全長) 약 280미터의 대형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의 주인이 그녀라고 비정한다.       


거대 분묘의 주인공이 여성인 경우는 또 있다. 

예컨대 구마모토 현(熊本県) 최대 규모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에 단독 매장된 수장은 30대의 여성이다. 

교토부(京都府) 단고 반도(丹後半島)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축조된 고분의 주인공도 40대 여성으로 밝혀져 있다. 


<후도키(風土記;풍토기); 713년>분고국(豊後国;오이타 현(大分県))의 기록 속에도, 산에 구멍을 파고 살면서 싸우다 전멸한  “츠치쿠모 야소메(土蜘蛛 八十女;선주민 80여인) ”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고 보니 맨 처음, 바다를 건너 백제에 가서 불교의 계법(戒法)을 배워와야 한다고 의욕충만이었던 것도 ‘젠신 아마(善信尼) 등’의 3명의 여성들이었다(<일본서기>崇峻元(588)년).     


고대 일본 고유법을 들여다 보아도,

“무릇 모임이나, 앉고 일어섬에 있어서도 부자(父子), 남녀의 구별이 없고”

“촌장(村長)이 국가의 법을 고할 때에는 남녀 모두 모여”

등, 남녀 간을 특별히 구별 짓는 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고대 일본에는 무려 6명(8대)의 여제(女帝)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스이코(推古) 여제 즉위 (593년) 이후 쇼토쿠(称徳) 여제 사망(770년)에 이르기까지 178년간 중 91년 간이 여성 천황 재위 시절이었다. 스이코(推古), 고고쿠(皇極=사이메이(斉明);중조(重祚)라고 하여 동일 인물이 2번이나 즉위), 지토(持統), 겐메이(元明), 겐쇼(元正), 고켄(孝謙=쇼토쿠(称徳); 중조). 

(현대에 이르는 약 126대 천황 중, 총 10대,  8명이 여성 천황)

 

이리하여 나라(奈良) 시대(710-784)까지만 해도 황후가 국정에 관여하는 분위기가 보편적이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 변모가 일어난다. 일본 조정의 ‘중국제 답습’ 유행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관념들이 침투했기 때문이다.

고닌(光仁)・간무(桓武) 천황 경부터는 황후의 국정 상의 독자적 기능이 상실되고, 황후궁직(皇后宮職) 조직도 축소되었다(橋本義則<『後宮』の成立-皇后の変貌と後宮の再編>). 

귀족 여성의 경우, 주로 후궁으로 들어가 황위 계승자를 낳거나, 상급 귀족의 부인이 되어 딸을 낳아 후궁에 들이거나, 또는 천황의 유모가 되는 등의 경로를 통해, 일족의 번영을 가져오는 존재로서 역할하는데 그치고 만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고전<곤쟈크모노가타리슈>(12초 성립)에는 이전 시대에는 보이지 않던 ‘여자의 마음’에 대한 교훈 섞인 이야기들이 쓰여졌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편자의 주장은 이러하다.          


“오래 같이 살아온 처(妻)라 하더라도 마음을 방심하면 안 된다. 여자의 마음은 이런(간통 관계 법사에게 시켜서 남편을 죽이려고 함) 자도 있다.”(24-14) 

“세상 사람, 신분의 위아래 없이, 세상 물정 모르고 좋지 않은 자가 말하는 대로, 여자 혼자 다니는 것은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 전해져 온다.”(26-21) 

“여자는 이처럼 인적이 드문 곳에 잘 모르는 남자의 부름에는, 세심의 주의를 해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절대 두려워해야 한다고 이야기 전해져 온다.”(27-8)

 “처(妻)의 질투심이 깊어서 근거 없이 의심하는 것은 남편을 위해 좋지 않은 일이 있다. 질투 때문에 ……부당하게 생명을 잃었다.”(27-21)

“마음이 나빠 보이는 처(妻)에게 마음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이를 듣고 본 사람 모두 말했다.”(29-14)

“마음이 어린(세상 물정을 모르는) 여자가 나다니는 것은 금지시켜야 한다.”(29-22) 

“짐승(제비)조차 남편을 잃으면 다른 남편을 맞이하지 않는다. 하물며 사람은 짐승보다도 마음이 있어야 한다.……이를 생각하니, 옛날 여자 마음은 이와 같았다. 근래의 여자 마음은 이와 닮지 않았다.”(30-13)

“그 본처(本妻), 얼마나 죄가 깊은가. 질투는 죄가 깊은 것이다. 반드시 뱀이 될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이야기 전해져 온다.”(31-9)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 믿지 못할 ‘처(妻)’에 대한 훈계가 넘쳐난다.

이전 시대까지는 보이지 않던 여성에 대한 교훈(메시지 전달)이 만들어지게 된 점에 대해서는 헤이안 시대(784년) 이후 두드러진 여성 기피(금기) 의식이 지적되곤 한다.     


헤이안 시대에는 피(血)에 대한 게가레(穢れ;더러움) 관념이 팽배하였는데 이것이 불교의 여성 기피와 맞물려, 여성은 더럽혀지고, 기피해야 할 존재로 인식되었다(西口順子 <女の力>).  

더불어 ‘오장(五障)’이나 ‘변성 남자(變成男子)’와 같은 대승불교에 의한 여성 차별 사상이 헤이안 시대의 학승(學僧)의 저작이나 문학 작품에 서술되기 시작하였다(吉田一彦 <古代仏教をよみなおす>). 

이렇듯 불법(佛法)이 주장하는 청정(淸淨) 유지의 입장으로부터 정예(凈穢) 관념이 침투하여, 이것이 신사(神事)에서도 여성 사제의 후퇴 등, 여성 기피가 나타났다(高取正男 <神道の成立>).

 헤이안 초기, 신(神)마다 등급을 정하는 신계 봉수(神階奉授)・승서(昇叙)가 유행하면서 남신(男神)을 상위로 하는 신(神)의 남녀 차가 명확해졌다. 9세기 중, 후기부터는 조정의 영향 하에 재지 유력자가 모시는 대신사(大神社)에서부터 남성 중심적으로 되어 결과적으로 여성 소외가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菅原征子 <平安初期の地方祭祀と女性>).
 

<곤쟈크>에 보이는 처(妻), 여성에 대한 의식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파생한 여성에 대한 ‘주의(경계)’ 의식들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 있어서의 남·녀 구별 의식은 신사(神事) 등의 의례 정비와 불교 등의 종교적 관점의 영향과 더불어 실제 사회적 관념의 하나로 굳어져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중세 가마쿠라 시대까지만 해도 여성의 지위는 비교적 괜찮았다고 할 수 있다. 상속도 남성과 같은 분배였고, 고케닌(어가인 御家人; 장군의 직속 부하)가 된 예도 있다. 결혼을 해도 생가(生家)의 성씨로 불렸다.


그러나 불교의 흥행 속에 14세기 무로마치 시대 이후가 되면 여성 차별화가 일반 민중에게까지 퍼져 나간 것으로 파악된다(野村育世 <仏教と女の精神史>). 

에도시대가 되면 막부에 의해 ‘삼종지도’와 같은 유교적 훈계서들이 본격적으로 여성 교육으로 내세워지는 등, 여성 지위의 하향화가 두드러졌다.     


근대 이후에는 여제(女帝)를 배제하는 분위기가 정통화 된다. 메이지 정부는 그때까지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계속되어 왔던 후궁 여관(後宮女官)의 정치성 권력을 일절 박탈하고 서구적인 부부상을 모범으로 제시하여 천황을 보조하는 근대 황후상(皇后像)을 창출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일본 사회 분위기에까지 연결되어 왔다.     


시대가 선택한 종교적 이념과 가치관 속에서, 여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 형성되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요즘 현 천황에게 여식 밖에 없으므로, 황실전범(皇室典範)을 고쳐서 여성 천황의 등극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돈다. 

이 시대에 걸맞은 ‘여성 시대’로의 진전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그들의 또 하나의 ‘기억된 역사(고대 여성 천황 시대)’ 속으로의 윤회를 꿈꾸는 것은 아닌지 문득 생각해 보게 된다.   


*사진은 고분 시대(4-6세기)의 하니와(埴輪) '술잔을 한 손에 든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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